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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요한목사님의 < 요한일서 >설교말씀입니다.

17 온전한 상을 얻기 위하여
제목- 온전한 상을 얻기 위하여
본문- 요한이서 1: 7- 13

한 주간 동안 제6차 필리핀 선교여행을 호산나축구선교회와 더불어 은혜 가운데 다녀오게 하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특별히 이를 위하여 기도와 선교용품으로 후원해 주신 호산나 서포터즈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20일에 폐막된 제85회 전국 동계체육대회에서는 MVP로 충남대표인 강민혁선수가 선정되었습니다. 한 개도 따기 어려운 금메달을 스키 부분에서 무려 4개나 목에 걸었습니다. 2위는 쇼트트랙에 2관왕을 차지한 김동성선수였는데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들은 인터뷰하면서 "다음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고 싶다"고 소망을 피력하였는데 모르긴 해도 아시안게임을 정복하고 나면 당연히 올림픽이나 세계 선수권에서 금메달 따는 것이 목표가 될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향하여 욕심이 많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운동선수에게 있어서 더 높은 이상과 꿈은 오히려 모두에게 격려와 갈채를 받아 마땅한것일 뿐 아니라 함께 나누어야할 공동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요한은 상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습니다. 헬라어로 "미스도스"라고 하는 이 상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어야 할 '봉사의 상급'이라는 의미가 강조되는 말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이제 부르심에 응답한 모든 충성된 일꾼들에게 "미스도스"를 허락하시므로 주님 앞에 서는 날 부끄럽지 않은 성도의 기쁨을 예비하라는 말씀인줄로 믿습니다.

이 땅에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주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주시는 는 구원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성도는 또한 하나님께로 부터 받아야 할 상급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충성된 봉사자에게 허락하시는 "미스도스"입니다. 우리는 흔히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것 같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만,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결단하긴 했지만 주님을 위하여 충성되이 살지못하고 오히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세상일은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학생이 대학 입학 시험을 보았는데 원하는 대학에 갈만한 점수가 나오지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원서를 내었습니다. 얼나 후 통지를 받았는데 예비후보 몇 번이라고 하는 결과였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학생은 그 대학에 가고 싶은 열망이 있어 기다리던 중 다행히 등록을 포기함으로써 생긴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예비후보에게 등록을 하라는 통보를 받은 것입니다.

비록 예비후보로 입학을 했지만 1학기부터 매학기마다 열심을 다해 공부를 하여 그는 수석을 차지하며 졸업을 하였습니다. 부끄러움이 변하여 자랑이 된 것입니다. 세상의 학문은 꼴찌로 들어갔어도 열심히 하면 1등을 만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상급없이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 제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지요. 다시 한번 지구에서 상급 있는 인생을 살고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마치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거지 나사로를 부러워했던 부자가 간청하여 자신의 5 형제만이라도 믿음으로 살도록 나사로에게 부탁하고자 했으나 , 오히려 그곳에는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맡기라는 충고만 듣게 된 누가복음 16: 19-31의 말씀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인생은 연습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을 주셨을 때, 우리에게 든든한 건강 주셨을 때, 우리에게 다영한 재능과 풍성한 물질을 허락하셨을 때 힘을 다하여 충성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미스도스가 있어야지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봉사에 대한 상급이 있어야 합니다.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와 봉사에 대한 상급은 다른 사람이 대신하여 줄 수가 없는 일이기에 더욱 중요합니다.

과거에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예수 믿으시죠? 라고 하면 종종 이런 대답을 듣곤 했었습니다. 우리 마누라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집사인데 천국갈 때 마누라 치맛자락 붙잡고 가면 안된겠느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구원의 은혜와 봉사에 대한 상급은 아내가 헌신했다고 해서 나누어 지는 것도 아니고, 가족중에 누군가가 순교했다고 해서 덤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주님의 말씀과 같이 각각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자신의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선언합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을 향해 많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실제는 오늘날 우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실감할 수 있는 현상들입니다. 우리를 미혹하는 거짓교사들, 즉 적그리스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언제나 그들은 우리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합니다. 성경대학, 무슨 신학교 무료로 오세요. 초등학교를 안 나와도 좋습니다. 무료로 오십시오. 학교 오기가 힘듭니까? 통신으로 좋습니다. 그런 식으로 어리석은 이들을 유혹하여 잘못된 사상과 이론을 주입시킵니다.

오늘 거짓교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7절은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 여러 신학적 이론이 있지만, 당시 초대교회를 가장 어지럽혔던 적그리스도의 대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심은 인정하지만, 예수께서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와 더불어서 요한이서에서도 이 부분은 계속적으로 강조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미혹되지 않기를 요청하고 있는데, 10절과 11절에 보면 얼마나 강조를 하고 있는지 그 내용은 경고의 수준입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은 자, 곧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써 이 땅에 오신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지 않는 다른 교훈을 가진 자들이 너희들을 방문할 때 너희 집을 들이지도 말 것이며, 그들과 인사하며 교제해서도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21세기에 가장 대표적인 영지주의자, 적그리스도는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간간히 여러분 집을 방문하면 여러분들 중에는 그들을 문을 열어놓고 그들을 환대합니다. 음료수도 대접하고, 쇼파에도 앉게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눕니다. 목사님, 걱정 마세요. 우리는 분명합니다. 우리 신앙은 확실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스스로 꽤 멋있는 사람처럼 도취된 듯 말합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요한사도는 지금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집에 들이지도 말라. 인색해서 그런 것입니까? 사랑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여러분, 요한사도의 별명이 무엇입니까? 처음 주님의 우뢰의 아들이라고 별명을 지을 정도로 성격이 급하고 불의를 참지 못했던 그런 사도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주님 부활하신 이후에 복음 증거자로써 살아가면서 그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은 제일 먼저 사랑이 생각납니다. 그도 늘 복음을 증거하면서 복음의 내용이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목숨을 주신 것 같이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그를 위해서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는 오직 사랑의 복음만 전한 분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의 사도가 초대교회 성도를 향해서 말씀합니다. 적그리스도가 너희 집에 들이지도 말라. 인사도 하지 말라.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 함께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진리를 떠나서 공동체를 박차고 나간 사람들입니다. 공동체는 나갔지만, 서로 얼굴은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자기의 집을 방문합니다. 초대교회는 순회전도자, 순회 설교자들이 많았습니다.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가정 가정을 방문하면 주변의 성도들을 모아서 말씀을 듣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는 했었습니다. 거짓교사들이 적그리스도가 성도의 가정을 방문하면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 말을 듣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예를 들면 어느 권사님이 잘못된 교훈, 잘못된 신앙을 가져 교회를 더났지만 성도기리는 서로 알고 있는 사이입니다. 그가 우리집에 온다고 할 때 집에 들이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지요.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지요. 당신과 당신의 공동체가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 냉정하게 행동하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현대 한국 교회 무엇이 문제입니까? 진리를 말하고, 복음 안에서 산다고 하면 뒤떨어진 사람처럼 이야기 합니다. 가슴 아픈 것은 신학교 안에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감신에서 그런 일 때문에 일부 목회자들과 염려하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이야기하면 굉장히 앞서가는 그런 사람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만, 기도생활을 강조하고 성령충만을 이야기하고 ,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 어처구니없게도 시대에 뒤떨어진 그런 사람으로 왕따를 당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가? 사실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랄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너희 집에 방문을 하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너희가 그들과 인사하고 교제하는 것은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일거다. 여러분의 개인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교회의 방향을 흐리거나 신실한 성도의 길을 흐리는 일을 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사랑은 주를 위해서 목숨을 드리기까지 온전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우리가 그 사랑을 지키고, 그 사랑의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때때로 냉정하고 분명한 성도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사도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에 대한 경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편지를 통해서 요한일서를 보내고, 요한이서를 보내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기를 원하노라.

그렇지요? 우리가 편지로 하는 것도 중요하고 요즘 같으면 전화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직접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전도사님들에게도 늘 권면하는 것이 있습니다. 전화로 하지 마세요. 전화로 상대방의 안위를 묻는 것은 아주 불가피할 경우이지만, 어떤 경우라도 직장이라도 낮에 안 되면, 밤에라도 찾아가세요. 얼굴과 얼굴을 보면서 심방하세요.

그것 아니면 다 의미가 없습니다. 편지와 전화, 이런 부분들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한계가 분명한 사역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그러므로 이제 내가 여러분들을 직접 만나서 이런 부분에 대해서 더 분명한 말씀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사역으로 떠오른 것이 상담사역입니다. 직접 만나는 것입니다. 만나보면 들었던 것과 너무나도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어요. 만나도 여러 사람을, 다양한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어디에 가서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도를 섬기고, 성도를 양육하는 일에도 이런 방법을 가져야합니다. 사도요한은 그들을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성도들을 책망하고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이 바른 길로 가게 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성도로써 바른 길을 가는 기쁨을 확신시켜 주기를 원한다는 말씀입니다.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 자녀들이 곧 성도들을 향한 사도요한의 간절한 말씀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온전한 상을 얻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상, 특별히 구원의 은혜일 뿐만 아니라,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 주신 은혜를 가지고 봉사의 상급이 있기 위해서 우리는 온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마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땅에 묻고서 그것을 잃을까봐 주님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땅에서 한 달란트를 꺼내서 주인에게 드렸지만 주인은 간수를 잘 하였노라고 칭찬하기 보다는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네가 가지고 있는 그 한 달란트마저 내가 빼앗아서 헌신적인 다른 사람에게 주겠노라고 했습니다. 두 달란트, 혹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갑절을 남겼지만 주님의 칭찬은 똑같습니다.

여러분,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가끔씩 불평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을 느낍니다. 신문을 보면, 어떤 사람은 평생에 장관을 한 번만 해도, 판사 한 번만 해도, 평생 판사 집안이라고 영광을 누릴텐데, 어떤 분은 3번 4번씩 장관을 하는 분들이 있어요. 너무 불공평하지 않느냐고 그렇게 여러분들이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다섯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를 남겼던지, 두 달란트로 두 달란트를 남겼던지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의 내용은 똑같습니다. 다른 사람 바라보면서 불평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를 소중히 여기면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맡은 자로서 충성을 다함으로 상급 있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너희는 삼가 우리의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성도들을 향한 주의 종의 권면의 말씀을 듣습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 구원의 기쁨을 간직할 뿐 아니라 봉사의 삶을 통하여 미스더스, 주님 주시는 상급을 온전히 유지하고, 누릴 수 있는 충성된 청지기로 삼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6 진리안에서 행하는 기쁨
본문- 요한이서 1: 1- 6
제목- 진리 안에서 행하는 기쁨

오늘 말씀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기쁨’이라는 제목입니다. 조금 전에 우리가 불렀던 찬송도 우리가 주안에서의 기쁨을 고백한 찬송입니다만은 주님과 함께 신앙의 길을 가는 여러분들의 그 길이 언제나 평안하거나 형통하지는 않을지라도 내게 기쁨이 여전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확신 때문인줄로 믿습니다.

요한일서에 이은 요한이서는 내용과 배경이 요한일서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중 한 장으로 되어있는 아주 짧지만 그러나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 담겨져 있는데, 그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이단 사상이나 부도덕한 생활을 경계하지않고 방종으로 이끌어가는 적그리스도의 미혹을 막기 위하여 이 서신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1절에 보면, 발신자가 장로요, 수신자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라" 그런데 발신자인 장로가 누구일까 하는 부분은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전통적인 해석은 사도요한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해석을 지지합니다.

뿐만아니라 '장로'라는 명칭의 의미와 역할에 있어서는 지금 시대의 장로와는 의미와 범위가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 같으면 목사와 장로의 사역과 권위를 통합한 대단히 폭넓은 의미에서의 직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편지를 받는 사람을 분명하게 지칭하면서 1절에서 3절까지 인사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인사말 속에는 전형적인 사도요한의 언어가 담겨져 있는데 이것은 그의 인격과 생활, 그리고 목회적 삶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러분들도 편지를 쓰실때면 나름대로의 틀, 어떤 형식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편지를 쓸때면 나름대로의 폼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경원집사님에게 제가 편지를 쓴다면 이렇게 시작할 것입니다. "주 안에서 동역자 된 나경원집사님께..." 편지의 첫 인사말은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전제입니다. 첫마디 문장만 보아도 마음이 푸근해져 기분이 상승하거나 혹은 다운될 수도 있음은 인사말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의 언어 속에는 그가 평소 잘 사용하는 단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 진리, 지식, 거함.... 이런 단어들은 전형적인 사도요한의 언어들입니다. 이런 언어들을 통해서 사도요한은 교회 일치에 대한 깊은 확신을 전달하려고 힘쓰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언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속성이나 인격 혹은 그 사람의 지식의 수준이나 신앙적인 관심까지도 잘 대변해 주기 때문입니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다고합니다. ‘저 분은 오늘 아침에 싸우고 나왔구나...’ ‘저 분은 예배를 통하여 큰 은혜를 받고 싶은 기대와 감격 속에 나왔구나...’ ‘저 사람은 오늘 별로 오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체면상 눈도장 찍으러 나왔구나....’ 얼굴 속에 마음의 생각이 담겨져 있으니 얼나나 재미있습니까? 다 담겨져 있어요!

슬픔과 기쁨이 표현되고 기대와 실망이 표현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모함과 지루함도 표현이 됩니다. 더구나 얼굴 속에는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 눈이 있어 더욱 분명히 그 사람의 내면을 깊숙히 들여다 볼 수 있기에 마치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어떤 분은 설교 시간만 되면 성경을 읽습니다. 설교와 성경읽기, 이는 굉장히 가까운 일 같은데 사실은 천국과 지옥처럼 거리가 먼 상황입니다. 말씀을 들어야 할 시간에 설교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책"에 눈길을 주는 행위는 마치 "당신은 떠들어라. 나는 관심없다"는 메세지와 다를바 없는 것입니다. 예배에서의 태도란 바로 내 마음을 하나님께 진솔히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말씀은 사모하는데 눈은 성경을 본다는 말은 억지일 뿐입니다.

우리의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하여 마음의 상태, 신앙의 상태, 관심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가름하기에 언어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척도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사도요한의 언어를 보면, 그의 언어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되는 일을 위해서 그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지식을 이야기하고 예수 안에 거해야 함을 이야기 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의 키워드는 "진리"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6절 가운데서 "진리"라는 단어를 우리가 잘 붙들어야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이 성경말씀의 의도가 뭔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주님은 바른 이해를 위하여 자주 비유를 들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중심적인 단어는 진리입니다. 2절과 4절에서 사도요한은 진리에 대한 그 의미를 잘 구별해 놓았습니다. 먼저 2절을 보면 진리의 2가지 내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할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 진리가 바로 우리와 함께 할 진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리일지라도 그것이 나와 상관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성령이 능력이요 권세라고 한들 그 성령이 나와 상관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령 충만함이란, 나의 배우자의 충만함이요, 교회 공동체의 충만함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충만함이 될 때 비로소 주님과 하나됨을 맛 볼 줄로 믿습니다.

진리는 또 다시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인 진리란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혹은 환경이 달라짐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예를 들어서 73년도 대학입학시험의 국사문제에서 우리 나라 구석기시대는 언제인가? 라는 문제가 나왔다면 ① 3만년전 ② 4만년전 ③ 5만년전 ④ 6만년전 이라는 문항중에 3만년전이라는 항을 선택해야 컴퓨터는 맞다고 응답을 합니다. 그것이 73년도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저는 최근에 새로운 뉴스를 들었습니다. 지난 12일에 충청북도 진천면 송두리라고 하는 마을에서 도로공사를 하던 중에 구석기 유물을 발견했는데, 주먹도끼, 주먹대패와 같은 유물을 무려 80여점이나 발견을 했다고 문화재청에서 발표하면서, 출토지층을 조사한 결과 5만년 전 구석기 시대 유물이라며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의 연대를 새로 써야한다며 흥분하였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제까지 알고있던 우리나라의 구석기 시대의 연대가 수정되어야한다는 말입니다. 내년도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학생들은 이번에 발표된 것을 근거로 해서 답을 써야 됩니다. 이는 학문이란 새로운 발견과 발명에 의해서 가치나 기준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빌라도에게 고소를 당해서 빌라도 법정에 서셨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직접 심문합니다. ‘니가 유대인의 왕이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두 번째 빌라도가 묻습니다. ‘사람들이 니가 진리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진리란 무엇이냐?’ 빌라도가 예수님을 향해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입니다. 당시에 헬라철학을 그대로 인수한 로마제국, 로마제국에서 로마의 군사, 특히 로마의 장교가 된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영광입니다. 최고의 학문을 겸비한 사람들입니다. 그가 진리를 모를 까닭이 없습니다. 주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철학적 관심 때문이 아니지요.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지금 빌라도가 예수님을 향해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학문적 관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지요.

지금 빌라도 머릿속에 진리라고 하는 개념은 지금 시대가 로마제국시대가 아니냐? 다시 말하면 로마제국처럼 힘을 가지고 지배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냐? 그런데 지금 네가 나한테 고소당해서 죄인의 몸으로 내게 와 있는 주제에 무슨 진리 타령이냐? 그 이야기지요.
그런데 그를 향해서 우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얼마나 당당하신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대적인 진리는 세월이 변해도 우리의 환경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인 줄 믿습니다.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는 과거나 오늘이나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진리에 대한 확신은 이래야 합니다. 그 진리를 알 뿐만 아니라 이제 그 진리를 행한다 함을 들으니 내가 기쁘도다.

목회자의 기쁨은 이것입니다.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살 때,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살 때,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과 제도 속에서도 주의 자녀로써, 그리스도의 자녀로써 살려고 몸부림 치는 모습을 볼 때 기쁨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6절에서는 진리에 대한 기쁨을 실천하고 있는 성도들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수신자인 택하심을 입은 부녀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정의를 하시면서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는 이 계명을 쫓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을 수 있지요? 대답합니다.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결국 계명과 사랑이란 하나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 그것이 계명을 지키는 일이요,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요, 그것이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의 계명 안에서 행하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행하는 것, 주님이 모델이 되고, 주님이 모범이 되어서 그 주님을 따라서 사는 것, 그것이 사랑이요, 그것이 사랑을 지키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시면서 기뻐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스바냐서는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기쁨을 이기지를 못하신다. 왜? 잘 하고 있기 때문에......

견디기 힘든 환경 속에서, 견디기 어려운 시련 속에서 주님의 말씀, 주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생명을 거는 이들을 보면서 주님은 그 기쁨을 이기지 못 하신다. 찬송합니다. 고백합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사랑하는 성도의 삶이 언제나 진리 안에서 행하는 기쁨 안에서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님의 기쁨 되기 위해서 어떤 삶의 환경과 조건이 여러분들에게 다가와도 주님을 향한 그 삶, 기쁨이 되기를 원하는 여러분의 삶의 목표와 그 의지가 꺾이지 아니하고, 진리 안에서의 기쁨의 삶이 늘 여러분들을 통해서 표현되고 증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세상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어도, 진리이신 주님이 변할 수 없듯이 우리 역시 주님을 바라보며 진리 안에서 행하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위하여 오늘도 주님의 자녀로써, 주님의 계명을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행하기를 원합니다. 실천적인 삶, 구체적으로 행하는 평안의 성도들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5 우리로 알게하신 그리스도
본문- 요한일서 5: 18- 21
제목- 우리로 알게 하신 그리스도

오늘 말씀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앎’입니다. 이 '안다'라고 하는 말은 우리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부부가 몇 십년을 함께 살면서도 종종 하는 이야기가 ‘저사람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라든지, 오래된 친구인데도 어느 날 엉뚱한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것을 보면서 '그 친구 알다가도 모르겠어...’ 라고 황당해 할 때가 있습니다. 하물며 사이가 좀 떨어져 있는 관계라면 안다는 의미는 거의 피상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주간에 치루었던 지방 과정 및 자격심사에서 진급중에 있는 장로님들이 마지막날 자격심사를 받기위해 한 사람씩 들어오면서 자기 소개를 하였는데, "기독교대한감리회 중부연회 부천남지방 평안의구역 평안의교회 장로 아무개입니다" 라는 형식을 갖추어서 인사를 해야 하는데, 자격심사위원 목사님들 앞에 서서 하려니까 떨려서 중간에 빼먹기도 하고, 갑자기 자기교회 이름도 생각이 안나 절절메는 모습을 보면서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론 자신의 소속을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됨을 보았습니다.

‘교회 다니십니까?’ 라고 물으면 ‘예, 교회 다닙니다’ 라고 대답하지요. 그러면 그 다음 물어보는 수순은 "어느 교회 다니십니까?"이지요. ‘평안의교회 다닙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간단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이름을 몰라서 뭐더라? 하면서 머뭇거린다면 솔직히 그 다음은 볼 것도 없는 것이지요. 소속이 분명치 않다면 내용은 더욱 분명치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9절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라는 말씀에서 느끼듯이, 우리가 주님을 아는 첫 번째 의미는 소속에 대한 것입니다. 누구에게 소속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금요일을 중심으로 모이는 셀 그룹을 속회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속할 속자, 모일 회자입니다. 주님에게 속한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속회라고 모여서 고스톱 치고, 2부순서에 맥주 마시면 그것은 속회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이들의 모임에는 분명한 특징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말씀과 찬양이 있고, 거기에는 어려운 이웃을 위한 구제헌금의 손길이 있고, 거기에는 성도와 성도가 예수 안에서 갖는 사귐의 시간들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누가 여러분들을 보고 지방회나 사경회와 같은 모임에 갔다가 어느 교회냐고 물어본다면 '평안의 교회'라고 하는 말을 하기가 부끄럽습니까? 아니면 자랑스럽습니까? 자랑스럽지요? 저도 젊은 시절부터 평안의 교회 같은 좋은교회를 다녔다면 얼마나 좋을 뻔 했겠습니까? 할렐루야!

60년대에 아버님께서 약대교회에 처음 부임하신 후 지방 사경회를 가면 꼭 어른들이 물어봅니다. ‘넌 어느 교회에서 왔니?’ 그러면 저는 대답을 안 했습니다. 또 물어봅니다. ‘너 어느 교회에서 왔냐니까?’ ‘부천에서 왔어요...’ 그 때는 부평과 부천의 7개지방이 인천동지방이라는 이름으로 한 지방일 때였습니다.

교회 이름을 대기가 왜 싫었느냐 하면, 소문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중부연회 안에서 잘 싸우는 교회, 목회하기 힘든 교회로 이미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지요. 30명 밖에 안 되는 교회가 절반으로 나뉘어 가지고, 한 패는 11시에 드리고 또 한 패는 2시에 드려요. 서로 얼굴도 안 보겠다는 거예요. 교세도 지방 교회 중에 꼴찌에서 첫째나 잘 해야 둘째이었으니 어린 저에게도 창피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에 교회 이름을 알려주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헌데 ‘부천에서 왔어요’ 하면 그냥 넘어가 주면 좋은데, ‘야, 부천이 다 너희 교회냐?’ 그러는 거예요. 결국은 약대교회라고 대답 하지만 참으로 민망하기 짝이 없었지요. ‘어, 약-대-교-회 !’ 그 말 속에는 ‘싸움질 잘 하는 교회, 별 볼일 없는 교회를 다니고 있구나?’ 하는 비아냥이 가득 담겨있었기에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어린 마음에도 큰 상처를 입곤 했었습니다.

아버님께서 그런 곳에 부임하셔서 우선 둘로 나뉘어진 교회를 화해시키는데 거의 1년 이상 걸렸어요. 회개의 삶을 이루고 난뒤 교회 공동체가 일치의 기쁨을 맛보기 시작하면서 교회는 다시 전도의 문이 열려 새로운 가족들이 동참하기 시작한 줄로 믿습니다. 70년대에는 '약대교회' 하면 선교 많이 하는 교회, 부흥 많이 하는 교회, 특별히 청년들이 많은 교회로 굉장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누가 좀 물어보지 않나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지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어느 교회에 소속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어린 아이도 말하고 싶어 하기도 하고, 창피해서 말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을 만큼 소속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원하건데, 평안의 모든 성도들도 평생토록 이 교회가 건강한 교회, 모든 목회자가 오고 싶어하는 교회, 모든 성도들이 함께 예배드리며 주의 일을 하고 싶어하는 교회로 지속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교회는 연합된 지체이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손가락 끝이 썩기 시작하거나, 곪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픈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건강해야 합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은혜로 충만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에게 속해 있다면, 건강한 교회에 속해 있다는 자부심도 생기고, 다른 사람도 주께로 인도하는 일에도 담대함으로 새 힘을 얻을 줄로 믿습니다.

한 100년 전에 러시아가 좀 어렵다는 이유로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았어요. 720만불을 받고 팔았는데, 그 때는 그거 받으면서도 속으로 너무너무 좋아했어요. 저 미국 바보 같은 녀석들, 저 얼은 땅, 저 쓸모 없는 땅을 720만불이나 주고 사다니, 코만 컸지 저 멍청한 것들이야!’ 그렇게 생각을 했었어요. 러시아가 가지고 있을 때의 그 땅은 쓸모없는 땅이었어요.

그런데 그 알래스카가 미국땅이 되고, 미국의 소속이 되고 나서 알고 보니까 그 땅은 석유가 가득합니다. 알고 보니까 그 땅은 군사적인 요충지였어요. 환경적으로도 환경의 보고입니다. 지금은 그들이 아무리 후회하지만, 이제는 소용이 없는 거예요. 어디에 소속되어 불행할 수도 있고, 행복할 수도 있어요.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의 행복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우리로 참 된 자, 곧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하시는 것, 20절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좀 알아도 바로 알고, 깊이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껍데기만 알고서 아는 척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되 요한사도는 특별히 어느 부분을 알기를 원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써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인성을 가지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마다 적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당시에 적그리스도라고 표현되었던 대표적인 영지주의자들, 그들은 예수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노스틱의 영향을 받아서 가현설을 주장했어요. 그것은 보이지만, 그것은 영적인 존재이지, 육체로 오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초대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의, 그리고 사도요한의 많은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서 순수하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그 신앙으로 살아가던 그 초대교회 공동체 속에 이런 적그리스도들이, 거짓교사들이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교인들 중에 일부는 잘 못된 길로 따라가게 되고, 결국은 그 안에서 잘못된 그룹이 형성될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아예 교회를 떠나서 새로운 집단을 만들었어요.

그들은 윤리적으로 물질을 기피하고, 금욕적인 삶을 강조했습니다. 부부간에 결혼도 아이만 하나 낳으면 그걸로 그만이예요. 산 속으로 들어갑니다. 가정생활도 없습니다. 계명도 무시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계명을 지켜야 하지 않느냐 영적인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은 세상적인 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한동안 우리나라에도 권신찬이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구원파가 생기고, 무교회주의가 생기고 그러면서 그들은 세상적인 법을 어기고 살았어요. 그러면서도 부끄러워 하거나 하나님 앞에 죄스러워 하는 마음이 아니예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영적인 자유함을 얻은 사람은 육적인 생활은 상관이 없다는 거지요. 그런 논리를 가지고 그들은 성도들을 어지럽히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한 사도요한은 그들에게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마다 적그리스도라. 그리고 그런 적그리스도들이 성도들을 많이 해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 그는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신 자,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심에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보호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도 언제나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곧 20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속한 것도 중요하고,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걸음 나아가서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일치의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앎의 단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껍데기만 알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부잣집에 불이 났습니다. 소동이 일었습니다.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데, 다행히도 주인은 외출했다가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소동이 이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 집이 불타고 있었어요. 이 여주인은 용기를 내서 결심합니다. 불이 붙은 집에 뛰어들어갑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바라보면서 저가 무슨 특별한 결심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흙더미 속에서 무언가를 안고 나옵니다. 보니까 보석함입니다. 여주인은 안도의 숨을 쉬면서 이 보석함만 있으면 저런 집을 또 지을 수 있지. 그러면서 안도해요. 그러는데 그 순간에 위층에서 아이가 살려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아이를 구출하기는 너무 늦었어요. 결국 아이는 불에 타서 죽을 수밖에 없었어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재물보다 너희의 생명이 중하지 아니하냐. 이 사람은 그 급박하고 중요한 상황에서 제일 먼저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질 때에 그는 보석함을 들고 나왔어요. 여러분의 생명보다 물질이 소중해서 물질을 안고 불더미에서 뛰어 나오며 목숨을 거는 그런 삶을 여러분들은 살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최선을 다해서 여러분의 모습이, 시간을 다하고, 육체의 온갖 정성을 다해서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들의 삶이 그 보석함을 건지려는 그런 열정은 아닙니까? 더 중요한 생명이 불에 타고 있는데, 그것은 생각도 나지 않지요? 나중에 깨달아봐야 소용없는 일인데......

우리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창고를 또 짓고, 또 지으면서 행복해하는 어리석은 부자에게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불러가면 그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 어리석은 부자야. 오늘도 주님의 음성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귓전을 때립니다. 바라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어느 책을 보니까 남자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호기심이 생기지요? 여자들은 어떨까? 여자들은 두 귀로 듣고, 한 입으로 쏟아낸답니다. 생명의 말씀, 꿈에도 잊어서는 안 될 말씀, 재물보다 생명이 귀하고, 그 생명을 얻는 일에 생명을 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을 알고 나면,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어서 하나의 삶을 살며 그 때는 그 분을 위해서 살게 되는 줄 믿습니다. 주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주님이 무슨 소원을 가지고 계시는지 아무쪼록 한 영혼이라도 진리를 아는데 이르며 구원받기를 소원하시느니라. 디모데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소원을 말씀하셨어요. 주님의 소원은 우리가 진리를 아는데 이르고 한 영혼이라도 구원받는 것이 주님의 소원이구나. 그래, 주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자.

그래서 전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도는 교회를 키우고, 작은 교회가 큰 교회가 되는 게 전도가 아닙니다. 전도세미나에 가보면 주로 개척교회 목사님만 와요. 참 안타까워요. 그리고 저 보고 왜 왔냐고 그래요. 목사님 대교횐데, 뭐 대교회라고 하는 말은 그들 볼 때 대교회지, 사실은 우리교회는 중간 정도의 교회지요. 그런데 대교회 목사님이 왜 왔냐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소리입니까? 아니, 그만하면 됐지. 목사님 또 무슨 욕심이 있어가지고 전도 하는 거 배우러 왔냐는 거지요.

여러분 전도하세요, 전도하세요 그러면 목사가 욕심이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까? 교회가 만명이 되면 지금 사례비를 열배를 더 주나요? 정신 차리세요. 우리는 21년 전에도 2말 먹었구요. 지금도 2말 밖에는 먹지 못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작은 교회가 큰 교회되면 수단과 방법이 전도라. 그래서 전도해서 웬만큼 크면 그 다음에는 안 해요. 왜? 이제 컸는 걸 뭐.

한국 교회의 병, 한국 교회의 문제가 여기에 있어요. 아니잖아요. 우리가 작던지, 크던지 전도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명령이요, 주님의 소원이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그런 동기가 분명치 않으면 우리는 전도에 대한 확고한 자세가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 주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성도의 순결하고, 정말 하나님 중심으로 재물보다 생명의 소중함을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는 세상의 유혹을 받을 수 있어요. 여러분 사람은 편지를 쓰면 마지막 결론이 참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도, 요한사도도, 베드로사도도 마지막 결론은 참 중요합니다. 오늘 요한일서를 마무리하는 요한사도의 결론을 보니까 우리가 21절에서 보듯이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어요. 그 말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지금 사도요한의 머리 속에 초대 성도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 마무리해서 또 한 번 하고 싶은 말, 그것이 바로 우상에서 멀리 하는 삶, 우상이라고 하면 보이는 것도 우상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도 많아요.

특별히 물질의 우상은, 탐욕의 우상은 언제나 경계해야 할 우리의 삶인 줄로 믿습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은 엘리사의 치료사건이 나옵니다. 이웃나라에서 나아만이라고 하는 군대장관이 문둥병에 걸렸어요. 그에게는 권력도 있고, 부귀영화도 있는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몸이 썩어가고 있는데,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지만 치료되지 않습니다. 어느날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혀온 그래서 자기 집에 아내의 몸종으로 데려온 계집아이가 말합니다. 우리나라에 가면 엘리사라고 하는 목사님한테 기도 받으면 나을 수 있는데.....

절박하지 않으면 그런 이야기는 귓전에 들리지도 않는 이야기이지만, 지금 나아만은 절박합니다. 군대장관이라고 하는 권세가 무슨 유익이 있고, 부귀영화가 무슨 도움이 됩니까? 자기 몸이 썩어져 들어가는데..... 그 아이의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먼저 보내서 기별을 했어요. 군대 장관은 예를 갖춥니다. 수레에 각종 귀한 가득 답례품으로 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군대가 그를 호위했습니다.

엘리사 있는 곳에 다다라서 엘리사를 찾았지만 엘리사는 나타나지 않고, 제자를 보내서 오다가 요단강이라고 하는 곳에 일곱 번 목욕하고 가면 될 것 같습니다. 굉장히 분노했지요. 한 나라의 군대장관인데, 나를 좀 대우해 줄줄 알았는데, 제자를 보내서 가다가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이나 하고 가라고 하니까 굉장히 열을 받았어요. 씩씩거리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주변에 참모들이 이야기 하지요. ‘장관이여,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이 병 고치러 온 것 아닙니까?’

사람이 잘 못 판단할 때 중요한 것은 주변사람들입니다. 주변사람들이 더 잘 못된 길로 가도록 그렇게 부추길 수도 있고요. 혹 내가 잘 못된 판단을 해도 주변 사람들의 바른 권면 때문에 바른 길을 갈 수도 있는 줄 믿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여러분들은 잘 사귀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도 좋은 분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지요? 그러면 교회 안에 나쁜 사람들도 있느냐? 있지요. 정확하게 말하면 덜 된 사람. 덜 변한 사람. 아직도 예수님을 닮기가 아직도 십리나 남은 사람들이 있지요. 교회 안에 있지만 아직도 육체의 소욕에서 헤메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런 사람이 모델이 되면 진짜 곤란합니다. 주님을 닮은 사람을 가까이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 내가 부족해도 그런 사람 때문에 다른 길을 갈 수 있어요.

지금 나아만 장군은 자기는 자신의 지위 때문에 그런 부분들이 받아들여지기가 어려웠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그를 바로 권면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권면을 받아들여서 일곱 번 목욕을 하면서 성경에 보니까 어린 아이 피부처럼 희어졌더라고 했습니다. 치료한 줄 믿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해서 나아만에게 두 가지를 테스트 하신 거예요. 하나는 그의 교만을 꺾어버리신 것입니다. 주님 앞에 교만을 꺾을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여러분, 부자는 참 겸손하기 쉽지 않습니다. 세상이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교만해서 겸손해 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했겠습니까? 주님은 나아만의 교만을 먼저 꺾는 것이 치료보다 급선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육신의 질병보다 심령의 질병이 더 급하다 그 말이예요.

두 번째는 순종할 수 있는가를 물어보신 거예요. 순종은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하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일이예요.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순종할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한 후에야 나아만은 치료된 줄로 믿습니다.

얼마나 고맙겠어요? 그래서 그 선물을 다 드리려고 하니까 엘리사는 손사래를 치면서 그냥 가져가세요. 할 수 없이 돌아가는데 그 장면을 목격한 엘리사의 제자 게하시가 마음 속에 갑자기 탐욕이 생겼습니다. 욕심이 생겼어요. 그들이 모퉁이로 돌아간 다음에 엘리사 몰래 쫓아갔어요. ‘어떻게 오셨습니까?’ ‘사실은 우리 선생님이 가르치는 그 제자들 중에 두 소년이 너무나 어렵고 너무나 힘듭니다. 그 두 소년을 위해서 은 한 달란트와 의복 두 벌만 주시면 좋겠습니다’

탐욕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대의명분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고 하는 것을 많이 쓰지요. 다 드리려고 가져왔던 나아만이니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예요. 그러면 두 사람이요? 그럼 은 달란트를 둘 드릴 테니까 그리고 옷도 두 벌을 가지고 가세요. 그것을 게하시가 받았습니다. 돌아왔는데 엘리사가 게하시를 보면서 어디 갔다 오냐고 물었어요. 별 거 아니라고 둘러 댔지만,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너에 대한 것을 알게 하셨느니라.

지금 저 나아만 장군이 버리고 간 문둥병이 네게 들어올 것이다. 들어와도 영원토록 너와 함께 있으리라. 저주를 받았어요. 여러분, 믿음의 생활에도 탐욕이라고 하는 우상이 우리를 주장할 때가 있습니다. 이 우상에서 해방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멀리 해야 합니다. 이 탐욕, 끊임없이 도전하는 이 탐욕, 그것 때문에 목회를 망치고, 그것 때문에 신앙생활을 망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요한사도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면 우리는 그 분이 원하는 걸 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그 분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알아서 그 분의 기뻐하심과 그 분의 원하시는 삶들을 맞추어가는, 그것을 위해서 우리의 삶을 온전히 내어놓는 그러한 성도들의 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요한사도는 고백합니다. 내가 그런 삶을 통해서 이제 내가 예수를 알았노라. 내가 그러한 삶을 통해서 이제는 내가 예수 안에 있노라. 요한 사도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육신으로 임하신 예수, 그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임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심으로 나는 그 예수를 보았고, 그 예수를 주목하였고, 그 예수를 만졌노라. 예수 안에서 하나되는 이 분명한 고백이 오늘 평안의 성도들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로 알게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자녀로서의 분명한 소속감을 가지고, 세상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의 자녀됨을 기뻐하고, 자부심을 가지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어서 주님과 연합되는 삶을 살게 하시고, 주님이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늘 그 뜻대로 살아가는 지혜로운 주의 자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4 그를 향하여 담대하자
본문- 요한일서 5: 13-17
제목- 그를 향하여 담대하자

오늘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해를 주신지 한 달이 지난 2월의 첫 날입니다. 토요일 저녁, 1월31일을 보내면서 한 달이 이렇게 빨리 갔구나 하는 아쉬움으로 한 동안 깊은 묵상에 잠겨 있었습니다. 새해의 첫 달을 보내신 여러분들은 감회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흔히 나이에 따라서 세월의 속도가 다르다고 하는데, 20세에는 20Km로 , 30대는 30Km로 가다가도 50대에는 50Km의 속도로 세월이 달려가는 것이 느껴져 한 해가 너무나 빨리 감을 느끼게 되는데, 70 -80대의 어른들께서는 유수와 같은 세월의 속도감을 얼마나 강하게 느끼실지, 아마도 어지러울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일서 5장 13절은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알게 하기 위해 쓰셨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도 같은 서신의 저자인 요한사도는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라. 또한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고 요한복음을 기록 목적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결국 요한사도는 그 말씀을 듣는 대상은 다르지만, 말씀을 기록한 목적은 같음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는 의지와 그 영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그는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세상에 이기셨고, 세상을 이기셨던 그 이김이 바로 물과 피로 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이신줄로 믿습니다. 물은 세례를 의미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거듭나며,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옛 사람은 죽고 주님과 함께 새롭게 거듭나는 줄 믿습니다.

매월 첫 주일 거행하는 성찬식에서의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의미하며 떡은 그의 몸을 의미합니다. 결국 세례와 성찬이란 거룩한 성례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옛사람은 장사 지낸다는 것을 의미함이요, 우리가 그와 함께 새사람을 입어 천국의 소망, 곧 부활의 소망을 갖는다는 의미인줄 믿습니다. 우리가 그 분의 몸을 먹고, 그 분의 피를 마시는 이 성례전에 참여하는 성도의 행위는 곧 예수의 죽음에 동참한다는 신앙고백적인 결단과 다름없는 헌신의 행위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그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새롭게 기억하셔서 옛사람은 십자가 아래에 못 박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새로운 영생의 소망으로 거듭난 믿음의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14절은 우리에게 중보의 기도를 요청하는 요한 사도의 권면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그 분은 아시고, 우리의 구한 바를 응답하셔서 열매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마태복음 7장 7절에서 ‘구하라 .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라는 강력한 구함의 기도를 요구하셨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할 말슴입니다. 우리에게 얻게 하시고, 찾게 하시고, 그리고 열리게 하신다는 응답의 약속은 지금도 유효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중요한 전제가 있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기도를 분명히 들으실 뿐 아니라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확신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기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 조지 뮐러는 수없이 많은 응답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기도할 때마다 응답을 받는 것을 보면서 신기해 했습니다.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기도할 때에 내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100% 확신을 가지고 구합니다’

이상한 말같이 들리지만, 의외로 사람들은 기도하면서도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의 확신을 갖지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죠지물러는 권면합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한 뒤 몇 분이 지나서도 여전히 당신에게 확신이 남아있다면 그 기도는 응답될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도하고 일어난 뒤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우리는 그 기도에 대하여 자신이 없는 거지요. 과연 기도한 일들이 응답 될 것인가?

오늘 요한사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 것인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일서의 독자들을 향해서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라고 하면 사망에 이르는 죄도 있다는 말인데, 두려운 말씀이지요. 그렇다고 하면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하는 16절 중반에 이 표현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 죄를 지어도 용서 받을 죄가 있고, 용서받지 못 할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요한 사도의 말씀을 통해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저는 2가지를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먼저 2장 18절에서 19절에 말씀입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용서 받지 못 할 죄에 첫 번째 요한사도의 지적은 초대교회의 은혜의 공동체에서 떠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에 일치를 깨뜨린 사람들을 말합니다. 여러분의 속회 공동체, 여러분의 선교회 공동체를 깨뜨린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죄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 다시 한 번 인식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일치됨을, 하나됨을 깨뜨린다는 것이 용서받기 어려운 죄라고 사람을 죽인 것보다, 간통질을 하고, 도둑질을 한 것보다 이것을 하나님은 더 큰 죄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여러분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 하나됨을 깨뜨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를 않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피값으로 세워진 교회 공동체, 거기에 많은 셀 그룹들이 있습니다. 작은 소그룹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소그룹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일치를 깨뜨리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죄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을 적그리스도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망에 이르는 죄는 무엇입니까? 4장 2절에서 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요약을 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것, 이것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라. 여호와 증인의 대표적인 잘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신 예수,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 우리를 위해서 그 고난을 받으신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대표적인 두 모습을 요한사도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요한 사도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그들에 대해서는 구하라. 기도하라라고 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중보의 기도가 가능합니다. 우리의 연약한 성도, 우리의 연약한 이웃들을 위해서 우리는 중보의 기도가 필요한데, 요한사도는 이 두 가지의 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중보기도를 하라고 내가 권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이 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구원의 희망을 주시지만,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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