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오신 주님 (요 12:44-50)
본문
교회성장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신앙의 과정에 있는 사람들을 여섯으로 구분하였습니다.
1. 믿지 않는, 잃어버린 사람.
이들은 하나님을 거의 알지 못하며 자신의 상황을 고쳐 보려는 생각이나 관심이 매우 적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결혼식이나 장례식이 있지 않는 한 교회에 참석하지 않습니다.
2. 무관심한 주변 형 출석교인
이 사람들은 양 다리 걸친 형으로 종교적 의무를 행합니다. 주로 배우자(아내나 남편)가 신자여서,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교회의 예배에 정기적으로 출석합니다. 교회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어서 회의 때나 이런 때 발언도 하곤, 하지만 그리스도께는 개인적으로 헌신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이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신 기적과 치유 때문에 오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목적 없이 그냥 차창 밖의 경치가 보기 좋아 기차를 탄 사람입니다.
3. 호기심 많은 새 신자.
이런 사람들은 마치 삭개오 같은 사람입니다. 호기심이 있고 뭔가 충분히 검사해 보기를 원하며,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결국 뭔가 말씀하실 것이 정말 있다면 알아보자는 형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치명적이 사건이나 성령의 강한 내적 역사하심으로 다가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께 기회를 드리라.”는 데 대해 부담을 느낍니다.
4.성장하는 그리스도인
한 개인이 이 단계에 이르기까지 거듭남이 일어납니다. 이들은 확신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었고, 그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추구하면서 도움을 원합니다. 골로새서 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데로 믿음에 굳게 서서…….”
5. 섬기는 사람
교회의 중추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도 합니다. 훈련 받아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섬기며, 잃어버린 자 즉 믿지 않는 자들에게 아가가기를 원합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추수하는 일꾼들입니다.
6. 리더 / 목자
성장하고 섬길 뿐만 아니라, 사역의 한 부분을 맡아 양들을 돌보는 신자가 리더입니다. 이 리더들은 다른 사람들을 훈련시켜 맡겨진 일을 배가 하는 방법들을 배우는데 열심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같은 신자들입니다.
굳이 갖다 맞출 필요는 없지만, 교화의 직분으로 비교한다면,
집사는 네 번째 ‘성장하는 그리스도인’ 이상이어야 합니다. 거듭남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그러면서도 계속 성장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권사는 다섯 번째 ‘섬기는 그리스도인’ 이상이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교회의 훈련 프로그램에 참석해서 교회를 섬기는 일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 전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장로는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신앙도 성장해야 하지만, 목회 사역의 한 부분을 맡아서 양들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겨우 자기 신앙만 지켜나가는 정도로는 권사나 장로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가 어느 정도인가?
이런 말씀드리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부정적 효과로서 “그래, 나는 감이 아니야. 그러니 그만 두어야겠다.” 혹은 “그래, 누구누구는 감이 아니야. 저런 게 뭐 --- 라고.” 그렇게 남을 지적하는 겁니다.
긍정적 효과로서 “그래, 난 많이 부족하구나. 이제부터 좀 열심을 내야겠다.” 그리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앞으로 소망이 있습니다.
사람은 되어버린 존재가 아닙니다. 되어져 가는 존재입니다.
내가 50점짜리라면 50점으로 되어버린 거 아닙니다. 50점짜리이기 때문에 60점, 70점 끝내는 100점짜리로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수능 200점. “그래, 난 요것 밖에 안 되는구먼” 그리곤 그 이상의 소망을 가지지 못하고, 그래서 더 이상의 노력을 접어버리면? 그의 결국은? 실패만 반복하는 겁니다. 수능 200점. 그러나 소망을 가지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200점으로 300점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을까?” “수능점수가 인상의 전부가 아니다. 내 앞에는 얼마든지 기회가 있다.” 그리고 도전하는 사람. 그의 결국은? 마침내 성공하는 겁니다.
문제는, 신앙생활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버렸다는 겁니다. 교회에 나와 “하나님!” 하고 찬송도하고 기도도 하지만,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버렸다는 겁니다. 구원의 확신도 없고, 뭔가 봉사해야 할 일이 생기면 느지막이 나타나거나 일찌감치 새버리는 사람들.
그러다 교회에 문제만 생기면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 사람들.
김해 어느 집사님과 상담. 그 부부는 부산순복음교회 다녔습니다. 그러다 김해로 이사해서 김해순복음교회를 다녔는데, 그런데 남편이 그 교회를 안 나간다는 겁니다. 작은 교회에 가서 봉사하고 싶다는 것이 겉으로 드러난 이유입니다. 남편은 주일이면 이 교회 저 교회 다니고, 부인은 다른 교회에 가보니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양산순복음교회에 나간다는 겁니다.
이 두 분의 문제. 남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인정받기 위해 교회 나가는 것이고, 부인 역시 예수 그리스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스타일 따라 교회 다니는 것입니다. 도저히 순복음 스타일이 아니면 은혜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두 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하나님을 찾지만,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불신자들도 하나님 찾습니다. “아이고,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하나님이 이러실 수 있나?” 미국인은 무슨 일만 생기면 “오 마이 갓”(O! My God!) 그럽니다. 어느 스님이 겨울의 살얼음 판 위를 살살 걸어가다가 갑자기 얼음이 꺼지니까 “아이고 하나님”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 쓰이는 하나님은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보여 주셨고 직접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다 죄가 들어오자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숨어야 했습니다.
“숨었다.” 이것은 사람이 스스로를 어둠 속에 감추었다는 것입니다. 죄가 드러날까 봐.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고, 음성 들을 수도 없고, 교제 할 수도 없고,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이라 합니다.
죄인 된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아 나설 수 있습니까?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동행하던 아담도 죄를 짓자 숨어 버렸는데, 어떻게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나설 수 있습니까? 만약 죄인이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는 사라지고 맙니다. 마치 빛 앞의 어둠처럼.
이사야 6장, 성전에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를 뵌 이사야. 5절, “그 때에 내가 말 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 때 스랍 중 하나가 단에서 취한 핀 숯으로 이사야의 입술에 대며 그 죄를 사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살게 된 겁니다.
시내 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는 모세. 그가 여호와 하나님과 말씀하였음으로 인해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났습니다. 아론과 온 백성이 그 광채 때문에 모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사람들 앞에서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웠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이시겠습니까?
밖에 나가 태양을 보십시오. 눈이 부셔서 볼 수 없듯이, 사람은 하나님을 찾아 나설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라 하는 겁니다.
그 계시 방법.
1. 하나님의 영원한 권능을 통해서 만드신 세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려 주셨습니다.
로마서 1:20, “이 세상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말씀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신비로운 자연.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되어진 겁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2.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3.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1: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이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임마누엘을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곧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거기에서만이 구원이 가능한 겁니다.
빌립보서 2:6-11, “그 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위와 땅 아래에 있는 이들 모두가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본래부터 하나님이셨던 예수.
인간으로 오신 예수.
다시 하나님이 되셔서 영광 받으시는 예수.
그렇게 그분은 언제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는데, 예수님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곧 하나님을 본 사람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 하신다.”
얼마나? 어떻게? 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이것을 보여 준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도 끝도 없이 사랑 하셨다.(얼마나?)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어떻게?)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영생을 주기 위해서(왜?)
“전능하신 하나님” 이라고 할 때, 얼마나? 어떻게? 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여 주셨습니다.
죽은 자 살리시기 까지(얼마나?) 병자 고침, 죽은 자 살리심으로(어떻게?) 모두 다 믿고 구원 받도록 하기 위해(왜?)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46절,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 그것은 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수 없도록 그들은 어두움 속에 몸을 숨겼습니다. 이 어두움 속에 숨어 있는 자를 찾아내는 것이 빛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 뭐부터 만드셨어요? 빛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밝히러 오신 빛이 곧 예수입니다. 그래서 예수 없는 사람은 어두움의 사람이요, 예수 믿는 사람은 빛 가운데 나온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어떤 사람은 이 어두움을 죄악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 안 지으면 될 거 아니냐?” 그럽니다. 또는 “예수 없어도 뭐든 만들어 내며 잘 산다.” “예수 안 믿어도 예수 믿는 사람보다 더 구제도잘 하고, 도덕적으로 흠 잡을 데 없고... 어쩌고” 그럽니다.
그럼요. 예수 없이도, 어두움 속에서도 살 수 있다. 맹인들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라, 그냥 어둠의 예를 들자면, 앞을 못 보는 맹인들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살 수 있습니다.
수천 년 전의 미이라를 발굴했는데, 그 곁에 씨앗을 발견했습니다. 심었더니 싹이 났다는 것입니다. 어두움 속에 수천 년을 있어도 생명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뭐가 없어요? 열매가 없었습니다. 심겨지지 않았으니까, 빛을 보지 못 했으니까…….
생명이라고 다 똑 같은 생명 아닙니다. 산다고 해서 다 똑 같은 삶이 아닙니다. 열매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신앙. 그저 주일 낮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주어진 직분, 주어진 일이 있음에 불구하고 그런 것은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고, 그러는 사람 있습니다. 도무지 열매 없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다 똑 같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12,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그들이란?” 바로 그 앞 이야기에서 보면, 바로 간음하다 잡힌 여인과 그 여인을 정죄하려 다 사람들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나, 그를 정죄하고자 달려 온 사람들이나, 예수님은 그들 모두가 어두움에 있는 자들로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빛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어두운 마음, 어두운 것을 알려 줍니다. 빛이 없으면 어두움을 어두움인 줄 모릅니다. 그냥 사는 겁니다.
호롱 불 시절. 그게 어두운 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전기가 들어오고 전기불이 켜지자, 그 다음부터 호롱불이 어두워서 그 밑에서는 책 읽기조차 힘들었습니다. 전에는 호롱 불 밑에서 책도 읽고 다 했는데…….
그렇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요, 어두움 속에 있는 자들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려고 오셨는데, 그런데도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것을 지키는 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이미 구원을 얻은 자요,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 듣고도 그것을 지키지 않는 자는 어떻게 될 거야 하는 겁니다.
47절, 표준새번역,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서 그것을 지키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심판이 없는 건가? 아닙니다.
본문 48절, “나를 배척하고 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심판 하시는 분은 따로 계신다. 내가 말한 바로 이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예수님 자신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나를 믿어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3:18, “아들을 믿는 사람을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나를 믿으면” 이 말씀이 구원도 되고, 심판도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구원이 되는 것이고, 그럼에도 예수 믿지 않으면 그에게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구원과 심판의 기준은 “예수 믿느냐 안 믿느냐”하는 것입니다.
감사 한 것은, 예수님께서 구원하려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인 것입니다. 심판이 당장 없다고 아주 없는 것 아닙니다. 심판이 더디다고 아주 없는 것 아닙니다. 지금은 구원 받을 때, 지금은 은혜의 때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구원 받아야 합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결국 심판 당하게 됩니다.
세상 재판의 기준은 법입니다. 그런데 이 법이 엉망입니다. 일관성이 없습니다. 거미줄 같은 법입니다. 그래서 연약한 곤충 같은 사람들은 걸리고, 힘 있는 자들은 오히려 찢고 달아납니다.
이 세상의 법이 그리하니 하나님의 법도 그러한 줄로 착각들 합니다. 그래서 돈만 많으면, 권력이 높으면, 등등만 되면 하나님의 심판도 다 빠져 나가리라 생각들 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은 분명합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이요, 안 믿으면 멸망입니다. 여기엔 타협이 없습니다. 여기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 믿지 않으면, 그 심판의 때에는 애걸복걸하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등불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 결국은 구원이 문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 뒤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애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 한다.” 하였습니다.(11-12)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기준이 곧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49절,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고 또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친히 나에게 명령해 주셨다.”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명령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명령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그 명령에 순종하는데 있는 겁니다.
‘명령에 복종’은 별로 좋은 느낌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 하나님의 명령은 생명의 명령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보내신 이의 명령 곧 하나님의 명령이 영생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 믿으면 영생을 얻고, 누구든지 그 말씀에 배척하여 예수 믿지 않으면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영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