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말라.
본문
본문 : 야고보서 1장 12-18절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사람의 근원적인 문제들]이라는 책에서 케롤 톰슨은 악령이 사람들을 사로잡아 멸망으로 끌고 가는 대표적인 두 가지 방법을 소개합니다. 속임수와 수동성입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합니다.
사람들이 사단의 거짓말과 속임수에 넘어가는 이유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알면 거짓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은 사라지듯이 진리 앞에서 거짓은 사라지게 됩니다. 선악과의 유혹에 먼저 넘어간 사람은 아담이 아니라 하와였습니다. 아담은 하와의 유혹에 선악과를 먹은 것이고 하와는 뱀의 유혹에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그 원인 중 하나는 진리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유혹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들은 것은 아닙니다. 아담을 통해서 전달 받은 듯합니다. 뱀의 유혹 앞에서 그녀가 대답한 것은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하와는 사단에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진리를 몰랐던 것입니다.
야고보서가 기록된 시기는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은 이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4,000년은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마귀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하는데 사용하는 방법은 그 때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가 기록될 당시의 정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약속하셨고 교회는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자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고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들어 교회는 부흥했습니다. 교회의 부흥에 당황한 유대인들의 핍박이 시작되었고 그 핍박으로 인하여 믿는 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고 기독교는 계속해서 번성해 나갔습니다. 초창기 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온갖 핍박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 장로가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사단은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교묘하게 속이며 믿음을 무너뜨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시험과 환란 중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사단의 속임수에 속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고 말합니다.
야고보서는 주후 49년에서 60년 사이에 기록되었습니다. 지금은 야고보서가 기록되고 약 195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사단의 역사는 그 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사단은 여전히 믿는 자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하나님을 오해하고 신앙의 대열에서 낙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장로를 통해서 주시는 이 메시지는 지금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그럼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속였던 사단의 속임수와 사단의 속임수로 인하여여 그 당시 교인들이 쉽게 빠졌던 신앙적인 오해는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연단이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고생과 근심만 주시는 분이라고 오해하지 말라(12절)
본문에서 우리말로 시험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 원어를 보면 두 가지 의미의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연단을 말하는 것이고 마귀가 주는 시험은 유혹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연단은 훈련하여 성장시키시려는 것입니다. 훈련을 통해서 인정받으면 더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됩니다. 마귀가 하는 유혹은 넘어뜨려 망하게 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축복을 빼앗고 하나님과 원수 되게 만들기 위해 찾아옵니다.
12절에서 말하는 시험은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를 단련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를 통과하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광야에서 고생하다가 광야에서 죽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를 통과하여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시키시는 것입니다. 광야의 연단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우면서 자녀를 고생시키기 위해서 학교에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는 학교에 가기 싫어하고 학교 다니는 것이 너무나 괴롭습니다. 그런데도 부모는 자녀를 학교에 보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자녀가 미워서 자녀를 괴롭게 하려고 학교에 보냅니까? 아닙니다.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건강한 사회인으로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 학교에 보내는 것입니다.
야고보서가 기록될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가지 시험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사단이 주는 유혹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성장 성숙시키고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시는 훈련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교인들 중에는 고생하면서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 장로는 그들에게 속지 말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지금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과정을 통과했고 어떤 부분에서는 지금도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내가 고생하고 근심하며 괴로운 인생을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예레미야 선지자는 애3:33에서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고 말했습니다. 2. 사단의 유혹이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악에 빠뜨리는 분이라고 오해하지 말라(13-15절).
간혹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서 자신이 죄를 범해놓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곳으로 밀어 넣었다고 막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오해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만드시거나 우리를 죄 가운데로 밀어 넣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사람은 인격이 있기에 무엇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입니다.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자신이 판단하고 자신이 결정하여 행동하는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선택의 의지가 있다는 것은 책임도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도 죄를 범하는 것도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도 마귀의 뜻을 선택하는 것도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악을 선택하고 그 책임을 마귀에게 돌리거나 하나님께 돌려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마귀의 시험에 들어놓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기도 합니다. 자기가 시험에 든 것은 다른 사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부모 탓을 하기도 합니다. 목사 탓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함께 신앙생활 하는 다른 교우 탓을 하기도 합니다.
혹시 다른 사람 때문에 시험에 들었어도 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내게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 때문에도 아니고 다른 사람 때문에도 아니고 자기 욕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돈의 유혹으로 믿음이 떨어졌다는 것은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시험에 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 때문에 시험에 들었다는 말은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시험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결국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시험에 들게 되면 죄를 범하게 되고 죄를 범하면 사망의 쓴맛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인색한 분이라고 오해하지 말라(17절).
야고보서가 기록될 당시에 살던 교인들 가운데는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풍성하신 분이시지만 자기에게 만은 인색한 아버지라고 오해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풍성하시고 넉넉하신 분이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늘 풍성하게 역사하시는데 자신에게는 구두쇠처럼 인색하게 역사하신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그 오해를 풀라고 하나님을 소개하는데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각양 좋은 은사를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좋으신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이시지 어둠의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은 풍성하시고 각양 좋은 은사를 주시고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풍성하신 아버지이신데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는 신앙생활을 정말 빈곤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한 생활을 하는 것이 정상인데 광야의 말라비틀어진 초목처럼 비참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저는 두 가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오해해서 그렇습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시고 싶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좋으신 아버지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니 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대로 역사하십니다.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지만 믿지 않으면 영생은 없습니다. 믿는 자가 구원을 얻습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나님의 창고에 가득 채워놓고 우리의 믿음이 변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로 연단을 받아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을 가졌기에 하나님의 창고에 있는 선물들을 풍성하게 받아 누립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과거의 경험이나 자신이 처한 환경 등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와 축복을 믿지 못합니다. 믿지 못하니 받지 못하는 것이요 받지 못하니 누림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푸십시오. 딤전6:17에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롬8:32에서는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은사(선물)로 주신다고 약속합니다.
둘째는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탕자의 비유를 잘 아시지요.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범생이고 작은 아들은 막나니입니다. 어느 날 작은 아들이 아버지가 자신에게 줄 유산을 달라고 조르더니 재산을 챙겨서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은 방탕하기 시작하고 결국 거지가 됩니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지가 그를 받아줍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집나간 탕자도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로 소개 됩니다. 방탕하여 아버지의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거지꼴로 돌아오는 아들을 받아드리는 좋으신 아버지로 소개합니다. 이 탕자의 비유를 기도라는 시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당당하게 아버지에게 자신의 몫을 요구했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요구대로 그의 몫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어떻습니까? 아버지에게 요구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느 날 집 나간 동생이 돌아오고 아버지가 그 방탕한 작은 아들을 받아드리고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합니다. 이 때 화가 난 큰 아들이 집에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그 사실을 안 아버지가 나와서 큰 아들에게 권하자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라고 따집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긴 일도 없었는데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먹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큰 아들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는 아들이었지만 종의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것이 다 자기 것인데 아무것도 구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의 의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도 아들입니다. 당당하게 아버지에게 염소고기가 먹고 싶다고 구했다면 그 아버지는 큰 아들을 위하여 염소를 잡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양 좋은 은사를 주시는 분입니다. 온전한 선물을 예비하시고 우리들에게 부어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창고에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온갖 보화가 가득합니다. 하나님을 풍성하게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분으로 믿으십시오. 그리고 담대한 믿음으로 필요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히4:16에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기도하십시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4. 하나님은 변덕스러운 분이라고 오해하지 말라(17절).
우리는 주변에서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하나님도 그런 분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17절에서는 하나님이 변함없음을 표현하는데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말합니다. 히13:8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소개합니다. 그분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신 변덕스러운 분이 아닙니다. 언제나 동일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변하시는 분으로 느껴집니다. 환경을 바라보면 전에는 각양 좋은 은사를 주시더니 이제는 환란과 시험을 주시는 분 같습니다. 전에는 말씀도 잘하시더니 요즘은 삐지셨는지 전혀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을 만나주셨고 수많은 응답과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86세에 찾아오시고서는 99세까지 13년을 침묵하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변하신 것인지 13년의 세월을 아브라함과 교통을 중단하셨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태양은 어제처럼 오늘도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집니다. 내일도 마찬가지로 동쪽에서 떠서 서족으로 집니다. 그런데 하늘에 구름이 끼면 태양은 보이지 않습니다. 구름이 없어도 우리가 그늘 속으로 들어가면 태양은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태양이 변한 것이 아니라 구름이 태양을 가린 것입니다. 태양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태양을 볼 수 없는 곳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과 교통이 잘 되었는데 지금은 어려운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렸는데 이제는 고난만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절대 태양되신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더니 이제는 그분이 변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혹시 하나님을 가리는 구름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혹시 내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그늘 속에 들어가 있지는 않습니까?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물가에는 숭늉이 없습니다. 숭늉은 부엌에서 찾아야 합니다. 번지수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계시는 분입니다. 내가 문제입니다. 내가 주님에게로 돌아가면 주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계십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기 때문에 고생한 것이지 집에 있는데 아버지가 변해서 고생한 것이 아닙니다. 탕자는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집에 계시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나를 바꿔야 합니다. 5. 하나님은 나를 하찮은 존재로 만드셨다고 오해하지 말라(18절).
고난의 세월을 많이 보낸 사람들 중에는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야고보서를 받아보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연단과 시험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은 변덕스러운 분이라고 하나님의 존재만 의심했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하나님 앞에 사랑 받지 못하는 하찮은 존재라고 오해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야고보 장로는 18절에서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다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텔레비전에서 봤던 내용입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자기를 공룡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룡처럼 기어 다니고 공룡처럼 음식을 먹습니다. 보는 사람들은 흥미로웠지만 부모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낳은 아이가 자기를 돼지라고 생각하고 돼지처럼 행동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사람의 말도 하지 않고 돼지처럼 꿀꿀거린다면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부모가 그 아이에게 “너는 돼지가 아니야 너는 사람이야 돼지처럼 행동하지 말고 사람처럼 행동해야해”라고 말해도 그 아이가 계속 자기를 돼지처럼 생각하고 돼지처럼 행동한다면 끔찍한 일입니다.
성경에는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계 모든 민족 중에서 특별히 유대인들을 선택해서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에 비해서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모든 피조물 중에 으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해서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보게 하셨고 광야 생활을 통해서 가나안에 들여보내실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을 정탐하게 되었습니다. 정탐을 끝내고 돌아온 정탐꾼 중에 10명의 보고는 하나님을 기가 막히게 했습니다. 가나안에 있는 사람들은 장대하고 그들 앞에서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메뚜기 자아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을 메뚜기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는 지금 이 시대를 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형벌 받으셨고 성령님은 구속 받은 내 안에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성전 삼아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지금도 내 속에 계시며 나를 가장 좋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1장에서는 천사들이 나를 위하여 존재하고, 히3:5에서는 모세가 사역한 것이 나를 위하여 한 것이며, 히3:6에 보면 예수님도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충성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가치 없게 생각하고 여전히 “꿀꿀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아주 비싼 골동품을 몇 백 원어치 엿하고 바꿔먹는 일들이 흔했습니다. 골동품의 가치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어리석음은 자신의 가치를 모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사43:1-4을 보면 내가 얼마나 존귀한 사람이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나를 구속하셨고 나를 지명하여 부르신 분입니다. 내가 물 가운데 있어도, 불 가운데 있어도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며 애굽과 구스와 스바를 나의 속량물로 주시는 분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시각을 바꾸십시오. 내 눈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도 주관적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가장 정확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눈으로 자기를 보고 자기의 가치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가치만큼 인정하십시오. [사랑의 빛 교회] 경기도 감이동 361-4
(02) 443-9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