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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진정으로 원하셨던 것은 (눅 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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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진정으로 원하셨던 것은 (눅 10:38-42)


예수님을 모신 가정에 두 자매가 각기 다른 삶과 섬김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에 대한 평가 역시 전혀 다르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말씀이다. 갑작스런 주님의 방문에 대해 누구나 그렇듯이 마르다의 마음은 무척 분주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한가롭게 방안에 앉아 예수님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녀는 이제 예수님의 말씀에 취해 아예 바깥 일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는 듯했다. 그것보다도 몇백 배 중요한 일은 빨리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예수님을 대접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마르다는 이제 몸도, 마음도 함께 불편해진다.

그녀는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너무 바빠 주님의 말씀을 들을 여유가 없었다. 사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던 길에 있었던 사건이다. 마치 마르다는 당시 유대인들의 모습이요, 하나님을 섬긴다는 모든 제자들의 모습이었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물질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섬기는 자를 원하셨다. 진정 마르다는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분을 섬기기 위해 분주했으나 이러한 마음을 이해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마리아를 두둔하신다. 행동하는 신앙보다는 오히려 조용히 말씀 앞에 앉아 있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이기 때문인가? 그보다는 말씀 없이 바른 행동이 나올 수 없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이 나올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서론

살다보면 참으로 화가 나는 일이 정말 많이 있다. 이 때에 화를 다스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이러한 때에도 화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결국은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이다. 자기 자신과 가정, 이웃의 행복과 불행이 거기에 달려 있다. 그래서 틱낫한은 그의 책『화』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화는모든 불행의 근원이다. 화를 안고 사는 것은 독을 품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화는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고통스럽게 하며, 인생의 많은 문을 닫히게 한다. 따라서 화를 다스릴 때 우리는 미움, 시기, 절망과 같은 감정에서 자유로워지며, 타인과의 사이에 얽혀 있는 매듭을 풀고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오늘 본문도 잔뜩 화를 내며 달려온, 그러면서 내색할 수 없었던 한 여인의 화가 난 모습을 보시며 놀라운 교훈을 주고 계시는 말씀을 대하게 된다. 공생애 마지막 기간에 이제 십자가를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시던 주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셔서 베다니 동네의 마르다, 마리아 자매의 집에 들르신다. 갑작스런 손님의 방문이 있을 때 주부들은 당황하기 마련인데, 귀한 손님이 갑작스럽게 찾아오셨으니 두 자매도 음식 준비로 분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생 마리아는 언니를 도와 식사 준비를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방에 들어가더니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누군들 예수님 말씀을 듣고 싶지 않겠는가 하며, 혼자 말씀을 듣고 있는 동생에 대해 화가 잔뜩 나 있었다.

빨리 일을 마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데,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는 동생을 마르다는 참다 못해 혼내 주려고 방으로 들어간다. 예수님 무릎 앞에 앉아 말씀 듣는 일에 넋을 잃고 있는 마리아를 보자 더욱 화가 솟구쳤다. 그러나 그 화를 감추면서 부드럽게 예수님께 부탁한다. “빨리 저녁을 준비해서 대접해야 하는데 철없이 방안에만 앉아 있는 마리아 좀 꾸짖어 주세요.”그러나 주님의 답은 의외였다. “마르다야,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가만히 두어라.”
얄밉게 앉아 있는 그 동생에게 오히려 좋은 편을 택했다고 칭찬하시다니 …. 수고했어도 한 쪽은 허사가 되었고, 한 쪽은 오히려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형편 없는 것 같은데 주님은 인정하신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아무리 열심히 했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힘껏 살았고, 열심히 뛰었지만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면 우리의 일생은 얼마나 비극적인 생이 될 것인가? 무엇이 달라지게 한 것인가?

본론

1. 주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주님의 기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과거에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고 생각했다. 지구를 중심으로 온 우주가 돌고 있고, 지구를 중심으로 해서 별들이 운행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구는 하나의 작은 위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과학자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으나 교권의 힘에 의해 그들의 입은 봉쇄당했고, 때로는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가 무르익으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과 함께 대전환이 일어난다. 이것은 중심축이 달라진 사건이기 때문에 인류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전환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늘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판단하고 생각한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사고와 판단의 중심에 언제나 자기 자신을 둘 때가 많다. 교회도 자기의 생각대로 되어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주인이 아니고, 주님이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말씀하신다.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인 교회 역시 주님의 교회라고 선언하신다(마 16장). 우리가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과 제자들의 잘못이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대로 신앙생활을 했고, 그들에게 유익이 되는 쪽으로 성경을 해석했다. 언제나 신앙생활의 기준은 그들 자신이었다. 메시야가 오셨을 때, 그리고 자신들과 신앙 방식이 달랐을 때 건축자들의 버린 돌처럼 가볍게 버렸다. 제자들도 그들의 방식대로 예수님을 생각했고, 자신들이 원하는 쪽으로 예수님을 움직이려고 하였다. 이것이 모든 것을 무효가 되게 하는 오류를 낳게 한다.

마르다는 자기가 옳다는 판단의 척도를 가지고 예수님을 움직이려고 했다. 그의 판단 기준이 예수님의 판단 기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의 관습이나 생활 습관으로 보아도 분명 마르다의 생각은 옳았다. 손님이 왔을 때 배 깔고 방에 누워 만화책이나 읽고 있는 사람보다는 함께 힘을 모아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훨씬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런 여인이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는 며느리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아무리 옳았고, 전통과 생활 습관이 그렇다고 해도 지금 그들은 예수님 앞에 서 있고, 온 세상이 십자가로 가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했던 시점에 서 있다. 위대한 신앙인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해 귀를 크게 열어놓고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위대한 악성( )일수록 자연의 소리, 음악의 소리를 크게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베토벤이 악성이라는 격찬을 받게 된 것도 비록 그의 말년에 인간의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천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에 그는 교향곡“합창”을 쓰지 않았던가? 마르다는 지금 주님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고, 종교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2. 주님께서는 말씀이 중심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말씀 앞에 서야 한다. 말씀이 그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어야 하고,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예”라고 말씀하시면“예”가 될 수밖에 없음을 믿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판단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과학적 인식 능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가 다 되어가는 때에야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지나가는 강아지도 웃을 일 아닌가? 그 꽃다운 젊음의 때는 무심한 강물 흘러가듯 그냥 내버려 두시더니 도무지 불가능한 때에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이제야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고 하시니 웃을 수밖에! 그러나 아브라함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능의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어도 그는 이 말씀을 신뢰하였다
(창 18장). 인간이 가지는 판단의 척도가 그를 움직인 것이 아니라 말씀이 그를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말씀이 중심을 이루는 삶으로 나아간다. 모두가 나아가야 할 삶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중심을 두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만이 든든하게 설 수 있음을 알아야 했다.

3. 주님은 마르다에게 사람의 눈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신다

사람들은 늘 자기의 생각대로 편리하게 판단하지만, 그것에 어긋나면 화를 내고, 실망도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에서 판단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물을 보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필립 얀시는 그의 책에서, “성숙한 신앙은 인생의 모든 문제들을 사랑 많으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주변으로 끌어모은다.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사의 조건으로 삼는다. 좋지 못한 일이 생기면 그 일이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지 않고 그 사건 속에서 하나님과 결별해야 할 이유를 찾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나쁜 일들까지 나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놓지 않는다. 믿음의 사람은 두려움이 아니라 신뢰의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본다.”라고 하였다.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에 마리아는 분명 잘못하고 있었으나 오히려 주님은 칭찬하셨다. “좋은 편을 택했다”고 인정해 주신다. 마르다 편에서 보면 분명히 잘못된 것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을 따라 판단하면 그것은 분명 좋은 편이었다. 우리가 인생사에서 모든 것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그것에 따라 판단할 수 있을 때 바로 사는 것이 된다.

결론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며,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바른 신앙생활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신앙생활이 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예수님 주변에는 인정할 수 없었던 열심 있는 신앙인이 많이 있었다. 성경에도 해박하고, 나름대로의 기준에 의하면 그들은 좋은 신앙인들이었으나 주님께는 용납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 모두 당시에는 사회적, 종교적으로 엘리트들이었고, 자타가 인정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평생을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내 모든 것을 드려서 주의 일을 했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인정하실 만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무효이다. 지금 주님은 지상에서 마지막 주간이 되었으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좋은 신앙의 교훈을 주고 계신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과 기뻐하실 만한 헌신, 받으실 만한 예배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이 승천하신 이후 이러한 교훈을 따라 초대 교회는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언제나 마음의 귀를 열고 살았다. 그리고 이것이 엄청난 손해를 가져오고, 죽음의 길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자신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언제나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에 서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정 규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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