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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브레이크 (요 13: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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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브레이크 (요 13:21-30)


오늘 말씀은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신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6:70을 보면 예수님은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하셨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에게는 유다의 배반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유다의 배반은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앞일을 알 수 없는 우리들에게 나도 유다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불안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배반에 대한 주제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 문제를 집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 유다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많이 받은 인물입니다. 제자로 부름 받고 12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와 24시간 함께 공동 생활하셨습니다. 유다는 누구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유다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빼어난 설교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가장 뛰어난 영적 지도자로부터 인격과 삶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있어서 완벽한 멘토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이런 멘토를 얻기 원합니다. 좋은 설교를 접할 수 있다는 것, 본받을 만한 영적 지도자를 만났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유다는 그 모든 기회를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다가 돈궤를 담당하는 직분을 맡았다는 것도 큰 은혜였습니다. 금전출납관계는 전직이 세리였던 마태가 제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다에게 일임하신 후에는 감사(監査)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유다가 조금씩 돈을 횡령했음을 아셨겠지만 그의 직위 해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만큼 유다는 예수님의 신뢰를 받았습니다.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과, 변함없이 믿어주고 격려해주는 리더의 전폭적인 신뢰를 갈망합니다. 유다는 그런 은혜를 풍족히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과 신뢰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배반할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유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13:18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긴 후에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한 시편 41:9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유다의 발꿈치를 씻기실 때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씻겨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사랑과 신뢰를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는 유다를 볼 때, 예수님은 마음에 심한 괴로움을 느끼셨습니다. 유다는 이제 곧 부르심의 은혜와 택하심의 은혜를 모두 배반할 것입니다. 사명과 직분을 주신 은혜도 배반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과 변함없는 신뢰를 모두 배반할 것입니다. 배반한 후 유다의 결국이 어떻게 될지를 아시는 주님으로서는 이 일이 말할 수 없이 민망한 일이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시간적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 12제자 모두 배반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특별히 한명의 배반을 구별하셨습니다. 유다의 배반은 다른 제자들의 배반과 차이가 있습니다. 열 한 제자들은 돌발 상황에서 예상치 못하게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고의적인 계획 속에서 배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배반을 구별하신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측면은 십자가에 죽으실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에 유다에게는 좀 더 강력하게 회개를 촉구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한 측면은 예수님이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다가 갑자기 배반을 당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기록된 성경 말씀에 순종하신 것임을 밝혀놓을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보통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라는 문구로 말씀을 시작할 때는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실 때였습니다. 제자들은 무슨 중대한 말씀을 하실 지 귀를 쫑긋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충격적인 말씀을 듣고는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했습니다. 신기한 것은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같이 자기를 제외한 다른 누구를 지적하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 빼고 다른 녀석들의 태도가 요즘 조금 이상 했어, 다른 녀석들이 이 말씀을 듣고 회개해야 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마피아 게임을 하는 사람들처럼 서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습니다.

정도의 차이지만 배반의 요소는 모든 제자들에게 다 있었습니다. 모든 차량 운전자가 사고에 노출되어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대체로 운전에 능숙하다고 자만하는 사람이 속도위반단속에 잘 적발됩니다. 초보자도 사고를 내긴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운전에는 자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주로 대형 사고를 냅니다. 이처럼 ‘내가 배반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불안에 떨었던 제자보다 ‘이 말씀은 절대 내게 하는 말씀이 아니야’라고 장담하고 자만했던 제자가 훨씬 심각하게 배반했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다 배반할지라도 자기는 배반하지 않을 것이며, 죽는 데까지 따라가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목숨을 건지려고 예수님을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저주한 유일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진지하게 예수님의 말씀 앞에 자기를 성찰했더라면 적어도 실패를 최소화할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23-26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는 머릿짓으로 배반자가 누구인지 예수의 품에 의지하고 있는 제자에게 물어보게 했습니다. 베드로는 누군지 알기만 하면 당장 요절을 낼 심산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본문을 대할 때, 왜 예수님께서 ‘유다’의 이름을 제자들에게 밝히 말씀하지 않으셨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정확히 단언할 수는 없지만 유다의 이름을 거명했을 때 유다가 회개했을 것이라면 예수님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많이 경험하듯이 마음에만 있고 구체적인 범죄로 나타나지 않은 어떤 일을 직설적으로 지적할 경우 회개를 이루기보다는 오히려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마음이 완악한 사람은 더 반항적이고 완악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는 드러내는 것이 유다의 회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드러내지 않으시므로 나머지 제자들도 스스로 성찰할 기회를 주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만약 예수님이 공개적으로 배반자의 이름을 거명하셨다면 성질 급한 베드로에게 제거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26절을 보면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의 물음에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그리고 곧 한 조각을 찍어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유대의 식사풍습에서 음식을 찍어 건네주는 것은 특별한 우정의 표시였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유다를 향한 예수님이 최후의 사랑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유다에게 들어갔습니다. 사단이 들어갔다는 것은 그동안 예수님을 팔지 말지 갈등하던 유다가 팔기로 마음을 완전히 굳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대단히 무서운 말씀입니다. 최후의 사랑을 거절한 유다에게 이제 은혜와 긍휼의 시간이 마감 되었다는 통고이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은 은혜의 브레이크가 절벽으로 질주하려는 유다를 막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 브레이크를 잡아주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입장에서는 망설이던 자기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새 출발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입장에서 보실 때 그것은 은혜의 손길을 거두어버리는 심판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원하는 일을 자유롭게 하도록 방치해 두시는 것이 주님의 심판일 수 있습니다. 잘못할 때마다 일이 막히고, 양심이 찔리고, 고통을 겪는 것이 은혜입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 것으로,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유다는 모든 제자들이 속을 만큼 유다가 철저하게 이중 플레이를 했습니다. 유다는 겉으로는 유능하고 책임감 있게 돈궤를 관리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하나님 앞에 불성실했고 거짓되었습니다. 거짓과 위선을 가진 상태에서는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도 진실한 관계성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예수님과 또 동료 제자들과 깊은 관계성을 맺지 못했습니다. 또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랍비라고만 불렀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 정도로 생각했지, 신성을 가진 분이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배반의 키스를 하기까지도 예수님이 자기의 속마음을 전혀 모르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시치미 떼었습니다. 유다는 은혜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 속에 있었으나 배반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제자로서 실패하는 것은 외적인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그 내면에 있는 죄를 회개하지 않은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그의 앞에는 칠흑 같은 어둠만 펼쳐져 있었습니다. 유월절 저녁 식사에서,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행동 하나는 모두 유다의 죄악을 밝혀주는 강렬한 빛과 같았습니다. 유다는 그 빛에 비추어진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빛 되신 주님을 떠나 영원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반면 오늘 본문에 유다와 반대의 길을 걸은 사람이 있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의 품 안에 있었던 제자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유일하게 배반자가 누구인지 들은 사람입니다. 19:26을 보면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도망가지 않고 유일하게 그 곁을 지켰던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예수님의 사랑 받는 제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볼 때, 요한을 특별히 편애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비교적으로 더 사랑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랑받는 존재라는 자기 인식이 분명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하고자 합니다.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하고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신뢰해야 합니다. 부부 간에도 사랑을 의심하면 결국 등을 돌리게 됩니다. 상대방의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의처증을 가질 때 얼마나 큰 상처와 고통이 생깁니까? 때로 부모의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여 자살하는 아동의 소식이 가슴 아프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부터 우리도 등 돌릴 가능성이 많아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는 동안은 죄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주님을 사랑할 것인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셨는가?’를 살피는 일입니다. 사랑 브레이크로 나의 삶의 붙잡고 계심을 발견하고 그 은혜와 긍휼에 감사하는 일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배반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셨으나 사람들은 항상 그 사랑을 배반해 왔습니다. 저의 삶을 돌아볼 때도 배반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이상 배반하지 않으려고 둘째의 이름을 ‘은수(恩守)’ 곧, 은혜 은자에 지킬 수자로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게 주시는 은혜와 긍휼을 배반한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때때로 주님께서 저의 행동과 삶을 모르고 계시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때로는 신앙이 좋은 것처럼 가장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래 참아주십니다. 아담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아셨으나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던 것처럼, 가인의 죄를 아셨으나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던 것처럼 스스로 죄를 고백하기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바쁜 삶을 잠시 멈추기만 해도 저를 향해 베풀어지는 주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사랑 브레이크를 통해서 적절하게 극심한 죄로부터 막아주시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욕심을 부리지 않도록 하셔서, 하나님으로부터 등 돌리지 않게 하심을 보게 됩니다. 저를 향한 주님의 그 사랑을 깨닫게 되는 순간 제 안에 있는 모든 욕심이 비워집니다. 이 땅에 대한 모든 집착도 떨쳐버리게 됩니다. 불평과 원망도 사라지고 힘겨움도 잊어버립니다. 그저 모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다의 배반이 아니라 유다를 사랑하신 주님께 초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랑 브레이크를 잡아 주실 때가 은혜의 때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 브레이크를 놓으신다면 우리는 지금도 돌이킬 수 없는 낭떠러지에 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알게 합니다. 주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려는 마음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압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매일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시간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 동 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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