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자의 자기관리
본문
김철현 목사
갈5:16-24
지금 전 세계는 전쟁 중입니다. 스포츠 전쟁이 그것입니다. 세계의 이목은 한국과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는 월드컵 축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신문마다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전쟁에는 여러 가지 이변이 일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록도 달성되고 있습니다. 세계1의 프랑스가 42위 세네갈에게 일격을 당해 무너진 일이 세계를 웅성거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우리나라가 월드컵 첫 출전 이후 48년 만에 첫 승리를 거둔 것은 가슴 벅찬 감격입니다. 1954년 6월17일 스위스 월드컵에 처음 대표팀 골키퍼로 출전해서 헝가리에게 9:0이라는 수모를 당했던 <홍덕영 옹>이 감격에 겨워 그때의 빚을 갚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후배들에게 전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무려 48년 동안이나 그 패배의 응어리를 안고 살았으니 오죽 했겠습니까? 싸움은 반드시 승리자가 있고 패배자가 있어야 끝이 나는 것이 싸움입니다. 월드컵은 4년마다 열리는 일입니다 마는 실상은 매일 매일 이 싸움은 계속 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의 경기는 더욱 실감나게 하는 총성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82년 4월 발발한 <포클랜드전쟁>이 그것입니다. 영국령에 속했던 대서양의 포클랜드 제도를 아르헨티나가 선전포고 없이 침공했습니다. 그러자 도전과 응전 끝에 잉글랜드가 두 달만에 아르헨티나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아내기에 이릅니다. 이 일은 아르헨티나로서는 부끄러운 패배였습니다. 이후에 아르헨티나는 총성 없는 전쟁터로 장소를 옮겨 한풀이를 시작합니다. 포클랜드전쟁 이후 축구전쟁에서 아르헨티나는 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 전과 98년 프랑스 월드컵 16강 전에서 두 차례에 걸쳐 승리했습니다. 이 총성 없는 전쟁에서 연속 패배한 잉글랜드는 절치부심(切齒腐心)했고 드디어 2002년 6월7일 한, 일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승리함으로써 60년대 2승에 이어 80년대 이후 2연패, 다시 21세기를 맞아 서전을 승리로 장식해 역사를 정확히 40년 전 1962년 사상 첫 대결 승리를 안겨 준 칠레 월드컵의 무대로 되돌려 놓기에 이릅니다. 과연 총성 없는 전쟁이라 불러도 무색하지 않을 축구전쟁에 세계는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 전쟁은 계속 될 것입니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싸우는 것이요, 내일의 문제는 이기는 것이요, 모든 날의 문제는 죽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은 누구나 세 가지 종류의 싸움 속에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이 싸움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 싸움이란
먼저 자연과의 싸움입니다. 홍수라든가, 혹은 지진이라든가, 또 춥고 더운 기후에서 오는 많은 질병들과 싸우며 살아갑니다. 이 싸움에 이기면 건강하고, 이 싸움에 지면 죽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모습은 이웃을 협조자로, 반가운 사람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대하지 못 하고, 이웃과 더불어 싸워야 하는 긴장관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때는 하는 수 없이 웃지만 돌아서면 모두가 보이지 않는 경쟁자일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에게 속지 않을까?"를 생각해야 되고 "어찌하면 저 사람 보다 앞서 갈 수 있을까?"를 계산해야하니 이 얼마나 피곤한 싸움입니까?
또 한가지 우리들의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은 부득불 자기와의 싸움을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싸움이 있어 우리를 괴롭힌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자신의 욕망과 싸워야 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나약함과 싸워야합니다. 가끔은 자신의 게으름과 더불어 싸우며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자기 진실을 지켜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해 보셨습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제어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연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합니다. "홍수가 나면 어떻게 해야하나!","바람이 불면 어찌하나!" 혹은 경제문제에 대하여, 정치문제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합니다. 인간관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며 고민도 합니다. "왜 저 사람이 내게 이렇게 대할까?" 그러나 여러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고민하며 삽니까? 즉 자기 진실, 자기 존재를 찾으려고 얼마나 몸부림 쳐봤느냐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해자라고 하는 입장에서 한번 나를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나 때문에 불행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걱정거리가 되고 있나?"
이솝우화 중에 <파리와 좀 나비>라는 얘기가 있는데, 어느 날 파리가 꿀 항아리의 꿀을 먹다가 그만 꿀 항아리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거기서 꿀은 좀 더 먹을 수 있겠지만 날개가 꿀에 젖어서 날 수가 없게 되고, 마침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좀 나비가 펄펄 날면서 그를 비웃었습니다. "야 이 놈아, 변두리서 좀 빨아먹어도 충분할 걸 뭐 그 안에까지 들어갔다가 그 모양이 되냐, 이 미련한 놈아." 그랬답니다. 그러다가 해가 졌습니다. 주인이 등불을 켰더니 좀 나비들이 좀 더 밝은 곳으로, 좀 더 밝은 곳으로 모여들다가 그만 그 속에서 타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욕심, 자기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여기저기에 끌려 가다가 비참하게 희생되는 이런 모습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마음, 내 몸, 내 뜻, 내 습관, 내 성향 이대로 좋은 것입니까? 괜찮습니까? 한 번 자신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을 하다 보면 실패 할 때가 있습니다. 인간들이 실패하는 그 이유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욕심입니다. 욕심이 지나치면 실패를 낳게 됩니다. 두 번째는 목적이 잘못되었을 때 실패합니다. 자기 일생을 걸만한 확실하고 확고부동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보니까 멈출 수 없는 형편이었고 그럭저럭 지내 온 것일 뿐입니다. 이런 목적의식으로는 성공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합리적인 값을 지불하지 않은 것이 실패의 원인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큰 것을 원했으면 그 만큼 수고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했어요. 실패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자기 자신을 과신했습니다. 지나치게 자신을 믿은 것이 실패를 안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신앙 안에서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세상에 자기처럼 믿을 수 없는 존재가 없거든요. 여러분, 여기까지 깨달아 보았습니까? 아직까지 내가 무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마음먹으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지식, 내 감정, 내 판단, 도무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나를 너무 믿었습니다. 때로는 믿을 것이 못되는 줄 알면서도 믿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실패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내가 나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이것을 현대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풀어놓았습니다."오직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만 따르십시오. 성령께서는 여러분이 어디로 가야 할지, 또 무엇을 해야할지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만 살면 여러분은 육체의 욕망에 끌려 다니는 짓 따위는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언제나 우리의 삶이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갈등하며 살아가는데 결국 성령의 인도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승리에 이르게 된다는 진리를 바울이 가르치고자 함입니다. 육체란 우리가 자연적으로 타고난 본질을 가리키며, 성령은 새로 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나와 거듭난 나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계속 되는 속에 실패자가 있는가 하면 승리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자기한계>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 자신은 그토록 원하고 있건만 실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는데 이것을 <자기한계상황>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많은 욕구가 있다 할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고로 육체적 욕구에는 충족감이 없습니다. 언제나 부족한 것입니다. 그것이 순간순간 나로 하여금 실수하게도 하며 때로는 실패 속에 몰아 넣기도 합니다. 이것이 육체의 소욕이 가져다 주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이기게 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월드컵에 참가한 세네갈 대표팀의 <파디가>라는 선수가 대구의 금은방에서 금목걸이를 훔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그 금은방의 주인이 오히려 그 선수에게 순금 1돈 짜리 복 돼지가 달린 핸드폰 줄을 선물로 전달 한 것이 알려져 훈훈한 미담이 되고 있습니다. 그 주인은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세네갈 대표팀이 먼 나라에 와서 사소한 실수를 저질렀는데 너무 크게 문제가 되었고 그것이 부담이 되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며 이러한 일을 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성령의 이끄심이 육체의 소욕을 이기게 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고로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겸손해 져야합니다. 내가 무엇을 했고 어떻게 남을 도왔다는 생각들은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나는 무한한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다고 생각하며 시작해야합니다. 그럴 때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게 될 때에 그렇게도 어려운 나 자신을 이기게 됩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이 자기 노력으로 해 보려고 애쓰다가 더 비참해 지는 것을 많이 봅니다. 참으로 비참한 사람은 자기 욕심에 끌리는 사람이요, 더 비참한 사람은 자기 욕심을 이기지 못 해서 몸부림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고 해서 마음속에 내면적인 투쟁이나 갈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나 비 그리스도인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갈등과 마찰을 겪으며 삽니다. <마르틴 루터>의 말을 빌리면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일에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고 어떠한 육체적인 욕망이나 유혹에도 이끌리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감정이 사라진 목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성령 안에서 행하는 법을 깨닫게 된 이후 우리의 육체는 확실히 욕망과 유혹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모든 죄의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 이르게 되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이 육신은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영혼은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육신은 옛사람 그대로입니다. 구원받은 영혼과 구원받지 못한 육신 사이에 문제가 있습니다. 갈등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신이란 몸뚱아리를 이르는 것이라기보다는 회개한 다음에도 아직 우리 안에 들어있는 옛사람, 옛 본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 있노라 고백하는 사도 바울도 그 육신을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서 7:15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하였습니다. 영적인 바울과 육적인 바울, 속사람의 바울과 겉사람의 바울,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바울과 하나님의 법을 싫어하는 바울, 이 두 사람이 갈등을 일으키고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요한 사실은 중생한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이런 경험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런 이중적인 갈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거듭났다면 이러한 갈등과 고민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괴로워하였습니까? 마음으로는 죄에서 살기를 원치 아니하는데 살다보니 아직도 죄에 매여서 종노릇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구원받은 영혼은 죄를 미워하고 깨끗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몸에는 옛날 육신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대로 살지 못하고 실망하며 방황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투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청년 때만이 아닙니다. 노인이 되어도 싸워야 합니다. 사실 어느 한 순간도 마음놓고 살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선한 싸움>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는 이 모든 유혹과 갈등을 극복 할 수 있는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합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이 믿음을 잘 관리하는 자가 승리하는 자입니다.
세상 속에서도 자기관리는 중요합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믿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이끄심이라는 갈등 속에서 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를 원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승리가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