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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귀를 막는 것들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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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귀를 막는 것들 1, 2
정쌍모목사
[성경본문] 삼상8:10-22

(삼상 8:10) ○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말하여
(삼상 8:11)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신17:16, 삼상14:52
(삼상 8:12)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삼상 8:13)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왕상21:7
(삼상 8:14)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삼상 8:15)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1)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삼상 8:16)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삼상 8:17)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삼상 8:18)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 왕상12:4
(삼상 8: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삼상 8:20)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삼상 8:21) 사무엘이 백성의 말을 다 듣고 여호와께 아뢰매 삿11:11
(삼상 8:22)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성읍으로 돌아가라 하니라 호13:11



어느 목사님이 교회에 새로 부임했습니다. 첫 주 설교를 너무 잘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의 기대가 커졌습니다. 둘째 주에도 같은 설교를 했습니다.
셋째 주에도 같은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자 이제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야! 이상하다.
새로 오신 목사님은 왜 매주 똑같은 설교를 하실까?"
그런데 네 번째 주에도 똑같은 설교를 했습니다. 드디어 성도들이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
그래서 목사님 정신이 있습니까, 목사님? 벌써 네 번째 똑같은 설교를 하셨습니다. 언제 새로운 설교를 하실 것입니까?" 그랬더니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그때에 "오히려 제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나눈 말씀에 순종하셨습니까?
똑같은 설교를 했지만 순종한 흔적이 우리 중에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이 말씀에 순종하면 새로운 설교를 하겠습니다" 했다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에게 불리한 설교는 귀를 막아 버립니다
안 듣겠다고 합니다 ..............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사무엘 선지자의 긴 설교입니다.
사무엘이 이 긴 설교를 하는 것은 그들이 다시는 왕을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 것을 기대하여서 입니다.
그래서 왕의 제도가 어떤 것인지, 그 실체를 가르쳐 주어서 다시는 왕을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기를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사무엘의 그 설교에 귀를 막아 버렸습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의 설교에 즉 사무엘의 말에 귀를 막아 버립니까 사무엘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까?

1. 그들은 하나님과 지도자를 불신했기 때문입니다.
왜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관계가 깨어지면, 불신의 관계가 됩니다.

서로가 믿을 수 없는 관계가 되면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이 좋게 보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로 신뢰하는 사람들은 눈빛 하나만 가지고도 뜻이 통할 수 있습니다.
1
그러나 신뢰가 깨어지면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설득하고 교훈 할지라도 공허한 소리로 들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의 말을 전혀 들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무엘의 말이 틀려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사무엘의 말은 사실입니다.
왕이 생기면 그로 인하여 치루어야할 백성들의 대가는 더 커지고 더 많은 부담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사무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사무엘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는 이제 못 믿는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 대한 신뢰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 원인은 바로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였습니다.
그들은 사무엘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습니다.
사사는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신다고 하는 상징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이 두 아들은 사무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뇌물을 받고 굽은 판결을 일삼았습니다. 지도자가 부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정한 통치를 기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의 두 아들에게서 실망을 한 나머지, 사무엘까지 불신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모임이던 간에 그곳에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신뢰를 받는 지도자가 있는 모임은 다툼이 없고, 올바른 길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지도자가 신뢰를 받지 못하면, 그 모임은 영향력을 잃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사무엘에게만 있었던 것입니까?
물론 지도자들의 부패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신을 가져다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가 정당한 것입니까?
그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사무엘에 대한 불신은 겉으로 표출된 하나의 빌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들이 사무엘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실제로 다른 것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불 신앙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사는 내내 그들은 가나안의 문화와 종교에 마음과 정신을 빼앗기고 살았습니다. 사사시대의 암흑기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사사기 2장 10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그들이 곧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그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사사기의 암흑시대는 이스라엘의 불 신앙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위기에 처할 때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미신 섬기듯 필요할 때만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여러 민족들에게 고통을 당한 것은 그들의 불 신앙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그들이 어려움을 당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가나안 땅의 여러 나라들이 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해 그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사무엘상 7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의 강력한 군대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겼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겸손히 엎드려 도움을 구했을 때, 이스라엘은 왕이 없었지만 완벽하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이 '있고 없고'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사사들의 타락도 근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 신앙이 바로 그들의 귀를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서 하나님의 음성이 막혀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신앙의 근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공급받으며 살아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짓고 하나님을 향해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속하셔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3절 이하에 보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과 관계가 바르게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공급받으며 영원한 생명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믿음의 축복입니다. 여기에 사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바르게 세워진다면, 그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귀를 막는 것들 2 삼상8:10-22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를 지적하신 적이 있습니다.
씨앗은 생명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씨앗이 품고 있는 생명력을 싹틔우게 하는 것은 바로 밭에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 듣는 우리의 태도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래서 보세요 똑같은 복음을 듣고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 하며 회개함으로 구원에 이른 자들이 있는 반면에 마음에 찔림은 받았으나 복음을 거부하고 돌을 던져서 전도자를 죽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사무엘 선지자의 긴 설교입니다.
사무엘은 지금 열방과 같은 왕을 요구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너희가 원하는 열방과 같은 왕의 제도가 생기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설교합니다
11절에서 17절입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뭐라고 합니까 ? 너희 아들들이 군대에 끌려간다
농사지어서 왕에게 갔다가 바치게 된다 .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창과 칼을 만드는 일에 동원이 될 것이다.
너희 딸들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딸들을 데려 다가 궁녀와 시녀를 삼을 것이다.
토지를 징발해서 왕의 신하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더 놀라운 것은 17절 너희가 왕의 종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뼈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무엘은 그 뼈아픈 종노릇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너희가 다시금 그 종노릇을 택하겠느냐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라도 왕정을 철회하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기를 원해서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백성들은 19절에 보면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아니요, 그래도 우리는 왕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껏 사무엘의 말이 땅에 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 권위를 입혀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애초부터 들을 마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의 말을 듣지 않습니까 ?

왜입니까 ?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 그 이유를 생각 해보면

1.그들은 편견을 가지고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

편견이란 미리 내린 판단을 의미하는데, 대부분이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으로 잘못되거나 근거 없는 선입관을 의미합니다. 편견, 또는 선입견을 가지게 되면 진실이 왜곡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사무엘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결코 자신들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사무엘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사무엘을 보아 왔고, 사무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들에게 사무엘의 말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익숙함의 편견'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편견은 대개 두 가지 때문에 생깁니다.
하나는 무지 때문입니다. 모르니까 편견이 생깁니다.
또 하나는 잘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편견입니다. 이것이 익숙함의 편견입니다.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하시던 예수님께서 어느 날, 당신이 자라난 고향 나사렛에 가셨습니다. 그러나 나사렛에서 예수님은 환영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가버나움에서는 환대를 받으셨지만 나사렛에서는 냉대를 받으셨습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권능을 보면서 매우 놀라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예수님을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에게 한낮 목수의 아들일 뿐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로 보일 뿐입니다. 그들 속에는 어렸을 때부터 보아 온 한 사람의 아들이며, 익숙한 동네 청년일 뿐이었습니다. 바로 이 편견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마음을 사라지게 한 것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신앙 생활하면서 빠져들기 쉬운 함정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직분도 받고, 중요한 일에 세움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믿음이 전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고백도 없습니다. 신앙의 감동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사랑도, 기적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 본문과 제목만 보아도 오늘 목사가 어떤 설교를 할 것인지 다 꿰차고 앉아서 다 아는 말씀이니까? 하면서 한 시간 내내 졸다가 예배 끝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 이상한 것이 물어 보면 대답을 잘 못하는데, 했던 설교 또 하면 용케 알아냅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설교가 은혜가 있다 없다 평가합니다. 이것이 익숙함의 편견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이러한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기록되고 전해진 이래로 수천 년 간 그 말씀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역사와 제도가 바뀌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변하지 않고 다 이루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목사의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새것이란 없습니다. 전하는 사람이 다를 뿐이지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언제나 같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도 언제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말씀을 읽고 듣고 대하면서 늘 언제나 새로운 은혜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듣고 또 들어도 그 말씀이 신선하게 들리고 은혜가 되고 기쁨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편 96장에 보면 시인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새 노래가 무엇입니까? 새 노래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항상 부르는 찬송입니다. 항상 부르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찬양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성호를 부를 때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기대하고, 주님을 사모할 때,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새롭게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익숙한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날마다 새롭게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 들리는 소리가 늘 새롭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편견과 선입관을 버리고, 날마다 새로운 호흡과 새로운 은혜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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