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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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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성권목사 [성경본문] 요21:15-19

15절/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절/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절/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1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절/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 성도들이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디베랴 바다 곧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는 말씀에서(요21:14), 부활하신 후 세 번째 나타나신 사건이나 실제적으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나타나셨음으로(요20:14) 부활 후 네 번째 나타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 나타나신 것을 말씀합니다(요20:24, 26; 21:14). 물론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을 말합니다.
디베랴 바다의 일곱 제자들....
부활의 주님을 친히 목도한 사람들입니다. 더욱이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는 엄청난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일곱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 갈릴리 바다로 내려가 고기 잡는 옛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눅5:5).
부활의 주님이 옛 모습으로 돌아가 버린 일곱 제자들을 찾아왔습니다.
밤새도록 아무 것도 잡지 못한 그들에게 부활의 주님이 이른 새벽 그 디베랴 바닷가에 찾아왔습니다. 바닷가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을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는 낯선 사람의 말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물을 던졌고, 그물을 배에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힌 고기를 보고서야 요한이 부활의 주님임을 알았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준비해 놓으신 아침 식사를 마쳤습니다.
부활의 주님 앞에서 식사를 마치기까지 일곱 제자들은 말이 없었습니다. 말 없는 침묵 속에 식사를 마친 후 주님이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것도 우리 성도들이 잘 알고 있는 대로 세 번씩이나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마26:35), 주님 앞에 다짐했던 그 마음이 무너지고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주님이 똑같은 말을 세 번씩이나 묻고 있습니다. 그 물음에 대답해야 하는 베드로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본문15절). 주님은 "희생의 사랑[아가파오(ajgapavw)]"을 하느냐 물으시고, 베드로는 "우정의 사랑[필레오(filevw)]"을 하는 줄 주님이 아신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의 그 착잡한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이것은 비단 베드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 모두의 문제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귀한 사랑을 받은 우리들, 베드로처럼 주님 앞에만 서면 어쩔 수 없이 작아지기만 합니다. "우정의 사랑[필레오(filevw)]"을 넘어 "희생의 사랑[아가파오(ajgapavw)]"을 이루지 못하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작아지기만 하는 우리들이지만, 주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아가파오(ajgapavw)] 내가 너희를 사랑한[아가파오(ajgapavw)]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아가파오(ajgapavw)]」고 했습니다(요13:34). 주님이 명하신 형제 사랑은 고사하고, 내가 주를 사랑하는 사랑은 어떠한지를 스스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이 시간 주님이 나에게 물으신다면 나의 대답은 어떠할까요?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고 대답할 수 있는 마음은 어떠해야 할까요? 다시 말해서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심은 「네 마음이 이러하냐?」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1.자꾸만 내가 생각나느냐는 물으심입니다.

이사야 49:15절/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어머님의 사랑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고 합니다. 한이 없고,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크고 값지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사랑 중에 어머님의 사랑보다 더한 사랑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 어머님의 사랑의 특징을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특징을 「잊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은 「잊으랴 잊을 수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곧 「잊으랴 애를 써도 자꾸만, 자꾸만 생각나는 것」이 사랑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여인이 어찌 젖먹이를 잊을 수 있겠습니다. 미물의 짐승도 젖먹이를 돌봅니다. 때로는 자신의 몸을 던져 위험으로부터 보호합니다. 여인입니다. 더욱이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가 어찌 젖먹이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 젖먹이를 버리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젖먹이를 결코 잊을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어머니가 젖먹이를 잊을 수 있어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는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사랑은 어머님의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의 사랑[아가파오(ajgapavw)]"이라고 합니다. 그에 비해 인간의 사랑 곧 어머님의 사랑도 "우정의 사랑[필레오(filevw)]"입니다. 바로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의 차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부활의 주님을 직접 뵙고도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옛날로 돌아간 일곱 제자들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옛날로 돌아간 일곱 제자들을 다시금 찾아오셔서 아침을 준비하셔서 먹게 했습니다. 식후에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이 말씀은 「자꾸만 내가 생각나느냐?」는 말씀입니다. 「잊으랴 잊을 수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잊으려 애를 써도 몸부림쳐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베드로야, 네가 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하고 네 살길을 찾아가니, 나를 잊을 수 있더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의 일곱 제자들....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일까요? 평소에 주님이 하셨던 말씀을 그들은 잊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주님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로 돌아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느라고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시던 주님의 말씀을 잊었습니다(마26:32).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에게 천사가 전해준 부활 소식과 함께 부활의 주님이 다시 들려주시는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는 말씀도 잊어버리고(마28:10)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마26:32)」....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러 만나자는 주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흩어지는 제자들, 그들은 모두다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유일하게 남쪽 유대의 가룟 사람이던 유다도 이미 죽고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다시금 무덤을 찾은 여인들을 통해서 일깨워주었습니다(마28:10). 그러나 제자들은 믿지 못하고 갈릴리로 가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곳에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두 번씩이나 찾아오셨습니다(요20:19, 26).
마태복음 28:16-17절/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드디어 열한 제자들이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서 부활의 주님을 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주님의 말씀은(마26:32) 갈릴리 바다가 아니라 갈릴리의 어느 산이었습니다. 여기의 "산"에 정관사가 붙어 있어서, 주님이 명하신 "그 산"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열한 제자들이 "그 산"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잊으랴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갈릴리 바다가 아닌 "그 산"에 가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던 베드로에게만 하시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 각자에도 하시는 질문입니다.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자꾸만 자꾸만 생각이 나야 하는데,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베드로처럼 주님을 잊어버리고 돈벌이에 몰두하고 있지나 않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식 생각에, 부모 생각에 주님을 잊어버리고 있지나 않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자꾸만 자꾸만 주님이 생각나야 하는데 그러한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자꾸만 내가 보고싶으냐는 물으심입니다.

아가 2:14절/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아가서는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 왕의 사랑 노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꾸만 자꾸만 보고싶어집니다. 그래서 모두들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싶네"라고 하지요. 더욱이 보고싶은 데도 볼 수 없다니 더욱 보고싶어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바로 솔로몬 왕의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는 그 마음입니다.
아가 3:2절/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는 자를..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길거리를 헤매는 술람미 여인의 모습입니다. 시골 농촌에서 포도원지기로 일하는 여인을 솔로몬 왕이 버리고 따나갈 것을 염려하는 술람미 여인의 꿈 이야기입니다. 자꾸만 보고싶고 만나고 싶고.... 그래서 길거리를 헤매며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더욱 보고싶겠습니까....
아가 6:13절/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이 부분을 솔로몬의 노래라고도, 예루살렘 여인들의 노래라고도, 솔로몬과 예루살렘 여인들의 노래라고도 합니다. 여하튼 떠나간 술람미 여인을 향하여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는 그 마음이 자꾸만 보고싶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이 물음은 옛날로 돌아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베드로에게 「자꾸만 내가 보고싶더냐」고 묻는 것입니다.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싶네".... 이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하는 베드로에게 자꾸만 보고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산"에 가야 만날 수 있는데,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느냐는 물음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 각자에 주님이 묻고 있습니다. 자꾸만 보고싶은 사람이 있는데, "주의 전"에 가야 만날 수 있는데, "시간이 없다고, 사정이 생겼다고, 돈벌이한다고, 놀러간다고".... 엉뚱한 곳에 있을 수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정말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 스스로를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3.자꾸만 나와 같이 있고 싶으냐는 물음입니다.

창세기 24:55절/ 리브가의 오라비와 그 어미가 가로되 소녀로 며칠을 적어도 열흘을 우리와 함께 있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
"소녀로 며칠을 적어도 열흘을 우리와 함께 있게 하라"....
리브가의 뜻을 따라 이삭의 아내로 시집보내며, 어머니와 오라비가 열흘 동안 같이 있고 싶어합니다. 물론 지금까지 키워온 딸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머나먼 가나안 땅으로 시집보내는 섭섭함도 있습니다만, 그것도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꾸만 같이 있고 싶고, 헤어지지 않고 늘 같이 있고 싶은 게 사랑입니다.
사도행전 18:20절/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오래도록 머물며 같이 있고 싶어했습니다. 헤어지기 싫고 자꾸만 같이 있고 싶어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성도와 목회자 사이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간청하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며 작별하고 떠났습니다(행18:21).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좇았습니다. 목회자에게는 이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보고싶어 하시는 곳에서 하나님을 뵙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떠나는 것도 사랑이요, 돌아오는 것도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훗날 에베소교회로 돌아왔습니다(행19:1). 2년 동안 머물다 또 떠납니다(행20:1). 자꾸만 보고싶고.... 그래서 오래도록 함께 있고 싶어하는,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도행전/ 20:37-38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사도 바울이 로마전도를 가슴에 품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3년이나 눈물로 기도하며 가르쳤던 에베소교회 성도들, 그러나 시간에 쫓기어 에베소교회에 들리지 못하고,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불러 작별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는 말에 울음바다를 이루고 있습니다. 헤어지기 싫고 자꾸만 같이 있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인데,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한다니 그 마음에 어떠하겠습니까.... 이것이 목회자와 성도간에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이 물음은 옛날로 돌아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베드로에게 「자꾸만 나와 같이 있고 싶더냐」고 묻는 것입니다. 못내 헤어지기 섭섭하고, 자꾸만 같이 있고 싶은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하는 베드로에게 자꾸만 함께 하고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산"에 가야 만나 함께 할 수 있는데,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느냐는 물음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 각자에 주님이 묻고 있습니다. 못내 헤어지기 섭섭하고, 자꾸만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주의 전"에 가야 함께 할 수 있는데, "시간이 없다고, 사정이 생겼다고, 돈벌이한다고, 놀러간다고".... 엉뚱한 곳에 있을 수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정말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 스스로를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4.자꾸만 내게 아낌없이 주고 싶으냐는 물음입니다.

요한복음 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우리 성도들 모두가 다 잘 아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아까울 게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에 자식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놓습니다.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어가려고 할 때 어미 닭이 독수리와 싸웁니다. 병아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내어놓습니다.
요한복음 13: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주님이 우리 성도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했습니다. 이는 변함 없는 사랑입니다. 끝이 없는 사랑입니다. 곧 영원한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끝없이, 변함 없이, 영원히 사랑하시되 목숨까지 아낌없이 내어놓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아낌없이 주고 싶고, 변함 없이 주고 싶고, 끝없이 주고 싶은 마음이 바로 사랑입니다.
로마서 16:3-4절/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사도 바울이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나의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을 위해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어놓았습니다. 이것이 동역자의 사랑입니다. 아무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처럼 복음을 위해 충성할 수 없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라고 했습니다(고전16:19). 자신들의 집을 교회로 내어놓고 믿음의 형제들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동역자로 불려졌고 또한 목숨까지 내어놓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동역자의 사랑입니까.... 오늘날에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처럼 「나의 동역자」라고 불림을 받지 못하지만, 그들 부부 못지 않게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충성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이들이 진정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이 물음은 옛날로 돌아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베드로에게 「자꾸만 내게 아낌없이 주고 싶으냐」고 묻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하는 베드로에게, 옛날로 돌아가 바다의 고기를 낚으니,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른 나에게 줄 고기가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 각자에 주님이 묻고 있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고 묻습니다. 내가 주께 무엇을 드리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니 자꾸만 아낌없이 주고 싶은 게 사랑인데, 주님께 아낌없이 주고 싶은 생각이나 있는지.... 정말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 스스로를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잊으려 애를 써도 자꾸만 생각나는 것이 사랑입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만 보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만 함께 같이 있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 더 나아가 자꾸만 아낌없이 주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자라가고 성숙해져 갑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부활의 주님을 친히 목도한 기쁨도 잠시 뿐, 옛 모습으로 돌아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일곱 제자들, "그 산"에서 만나자고 명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잊어버렸습니다.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만선의 기쁨은커녕 그래 가지고서는 먹고살기도 힘든 한숨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찾아오신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주님을 떠나서는 기쁨이 없습니다. 즐거움도 없습니다. 소망도 없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자꾸만 자꾸만 내가 생각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꾸만 자꾸만 내가 보고싶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꾸만 자꾸만 나와 같이 있고 싶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꾸만 자꾸만 내게 아낌없이 주고싶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고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하는 베드로처럼 우리 성도들은 말을 돌리지 맙시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하는 베드로처럼 우리 성도들은 주님께 떠넘기지 맙시다. 자꾸만 주님이 생각이 납니다. 자꾸만 주님이 보고 싶습니다. 자꾸만 주님과 함께 같이 있고 싶습니다. 자꾸만 주님께 아낌없이 드리고 싶습니다. 이 목숨까지도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내 마음을 보니,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당당하게 주님께 "사랑합니다!"고 사랑을 고백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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