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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신앙인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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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현 목사 주일설교(2005/10/02)

성숙한 신앙인의 고백
렘10:17-25


사람이 가장 진실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죽을 때라고 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죽을 때가 되면 지나 온 일생을 회고하면서 세 가지 정도의 후회를 한다고 합니다. 하나는‘좀 더 베풀며 살 것을...’하는 후회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하는 후회 중에‘돈을 좀 더 많이 모아 놓을 것을...’하는 후회가 들면 아직 죽을 때가 안 된 거랍니다. 사람은 가난하든 부하든 누구를 막론하고 마지막 때가 되면 ‘좀 더 나누어 줄 것을...좀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었는데...’하고 후회한다고 합니다. 이게 양심이고 죽을 때에야 가장 진실해 진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후회는‘좀 더 즐길 것을...’하는 생각입니다.‘괜한 세상을 불평하고 짜증내면 원망하고 살았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됐었는데, 좀 더 즐겁게 생각하며 살았어도 될 것을...’하면서 나 스스로 불행하다 여기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며 산 것이 후회스럽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좀 더 참고 살 것을...’하는 후회를 한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불가피하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까 그때 좀 더 참을 수 있었는데 그걸 참지 못하고 일을 그르쳤던 것이 후회스러워서 마지막 가는 길을 괴롭힌다고 합니다.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인생의 마지막에 이런 괴로움은 없을 텐데 안타깝게도 사람이 살면서 참 안 되는 일 중에 하나가 깨달음을 늘 유지하면서 사는 일이 참 어렵습니다. 금방 알았으면서도 잊어먹고 인식하면서도 수시로 실수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또한 마지막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살아가는 동안이 중요한 과정인 줄 아는데 그 과정이 늘 마음대로 안 되고 어려운 것이 인생입니다. 여러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만들어 내는 것도 어렵거니와 지키기는 또 얼마나 어렵고 힘듭니까?

[볼테르]라고 하는 프랑스 시인은 말하기를“사람은 살아가면서 참으로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정말 어려운 일은<비밀을 지키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묘하게도 무슨 비밀을 알고 나면 그것을 말하고 싶어서 못 견딥니다. 그래서 나도 지키기 어려운 비밀을 남에게는 꼭 지키라고 다짐받으면서 굳이 이야기를 해서 남까지 괴롭힙니다. 여러분, 비밀은 웬만하면 나만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나도 괴롭고 남도 괴롭게 하는 것은 잘 못된 것입니다. 어쨌든 비밀을 지키는 일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또 하나의 어려운 일은<고난을 견디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억울한 고통을 당하거나 원치 아니하는 고난이 왔을 때 그것을 이겨내기란 정말로 어렵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이겨 내느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 잘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성숙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어려움을 훌륭히 견뎌내고 이겨 낸 성숙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숙한 사람, 혹은 어른스러운 사람, 혹은 인격적인 사람, 혹은 사람 됨됨이의 그릇이 크고 위대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본 받기 원하고 존경합니다. 그런데 그 성숙과 위대함의 척도가 되는 것은 그의 지식도, 그의 능력도, 그의 소유도 아닙니다. 그 사람의 크기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에서 가름합니다. 얼마나 넉넉하게 참는지,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 그것이 그 사람의 크기를 말해줍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요소는 그 사람의 영적성숙도가 문제입니다. 즉 그 내적 존재가 얼마나 넉넉해서 인내하고 인자하냐는 것입니다. 영적 고난 앞에 신앙적으로 얼마나 그 고난을 이기고 견뎌내느냐가 그 사람의 영적 성숙도를 나타냅니다. 신앙인이나 비 신앙인이나 막론하고 고난은 똑같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은 그 고난을 받아
들이지도 못하고 이겨내지도 못해서 쉽게 무너지고 말지만 신앙인은 그 고난을 이겨냅니다. 이런 사람을 일반적으로는 인격적이라 말하며 위대하다 말합니다. 신앙인인 우리는 영적성숙자라고 말합니다. 영적성숙 자는 고난에는 뜻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고난을 보고 좌절하거나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그 뜻을 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인격을 높이 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하시는 장면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십자가 지실 것을 확실히 아시고 계십니다. 이쯤 되면 보통사람들은 주변사람을 못살게 굽니다.“내가 지금 죽게 되었는데 어떻게 좀 해보라”고...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마음에 여유를 가지십니다. 정신없이 자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으라.”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 것이라”하고도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체포하러 군사들을 뒤에 달고 올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뻔뻔스러운 가룟 유다가 예수님 곁에 다가와 자기들끼리 짠 신호대로 볼에 입을 맞추면서 아무 일도 없는 듯 인사합니다. 저 같았으면“야! 이놈아 네가 인간이야!”하고 어떻게든 한 방 먹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 순간 옆에서 참지 못하던 베드로가 앞 뒤 가리지 않고 칼을 휘둘러 제사장인 말고의 귀를 잘라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종의 떨어진 귀를 여유 있게 붙여주시면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이것까지 참으라.”주변 환경이야 어떻게 됐든 예수님의 마음은 여전히 고요하십니다. 자기페이스를 잃지 않고 딱 지키고 계십니다.“이것까지 참으라.”이것이 예수님의 인내의 한계입니다. 얼마나 굉장한 말씀인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바랍니다.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고통스러운 큰 사건에 접하게 되었을 때 보이는 반응에는 대체로 여섯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가 <기피 형>입니다. 현실에서 도망쳐서 숨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가족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무조건 도망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절망 형>의 사람입니다. 다 망해 버렸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절망하고 자살까지 서슴없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유형은<책임전가 형>입니다. 잘못 된 책임을 남에게 넘겨서라도 자기를 정당화 하려고 합니다. 이 고난은 누구 때문이요, 저 고통은 누구 때문이라고 돌리고 스스로를 위로받으려고 합니다만 피할 길이 없습니다. 또 하나는<원망 형>입니다. 잘못을 회피하려 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욕과 원망이 충천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닥치는 대로 다 원망하고 욕을 하면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좀 더 지나쳐서<무장 형>내지는<전투 형>의 사람이 됩니다. 원망이 지나쳐서 행동적으로 싸우려 드는 것입니다. 내 어려움을 다른 사람과의 싸움에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무조건 싸우려 드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유형은<성숙 형>의 사람입니다. 억지로 견디는 것이 아니요, 원망하는 것도 아니요, 절망하고 앉아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말없이 생각을 합니다.‘여기에도 분명히 뜻이 있을 것이다.’생각하고 넉넉하게 성숙된 인격으로 깊이 있게 봅니다. 성숙된 사람은 성숙한 자세로 고난을 보고, 문제를 보고, 사건을 봅니다. 힘들지만 바람직한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런 사람을 만납니다. 눈물의 선지자라 불리는 예레미야의 신앙고백을 봅니다. 지금 그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눈앞에 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죄를 짓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끝까지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이런 죄악의 도시를 생각하고 또 그 위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예레미야는 생각합니다. 이 사이에서 예레미야는 말할 수 없는 선지자적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 고민 끝에 예레미야의 고백이 나옵니다. 19절입니다.“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 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나의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이 고백을 잘 들어보면 예레미야의 두 가지 깨달음이 나옵니다. 하나는“이는 참으로 나의 고난이라.”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내가 참아야 하리로다.”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의 고백을 들어보면 나의 고난이므로 내가 참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당해야 할 것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있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라고 그 실상을, 그 사실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좀 더 나아가서 이 고난은 우리의 죄보다 훨씬 가벼운 것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저지른 잘못에 비하면 오히려 이 고난은 가벼운 것이요, 오히려 작은 것이며 마땅한 일을 당하는 것일 뿐이라는 자각입니다. 깨달음은 고통보다 중한 것입니다. 실패보다, 멸망보다도 더 중한 것입니다. 질병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깨달음입니다. 사람은 깨달음으로써 인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죽고 사는 것은 동물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동물은 끝까지 깨달음이 없이 죽지만 사람에게는 깨달음이란 것이 있습니다. 의인과 죄인도 죽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의인에게는 깨달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보십시오. 예레미야는 깨달음 뒤에 말합니다.“내가 참아야 하리로다.”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내 스스로의 판단과 비판을 멈추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을 놓고 내가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겠단 말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 판단과 비판이 언제나 문제입니다. 어떤 가정을 보면 부부싸움을 자주합니다. 쉬는 날도 없이 싸웁니다. 왜 그러는지 아십니까? 둘 다 너무 똑똑합니다. 너무 판단이 빨라요. 눈에 보이는 족족 판단하고, 어떤 것은 보지도 않고 판단하고, 어떤 것은 꿈으로 판단하고, 어떤 때는 그저 생각으로 판단해 버립니다. 서로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내 말만하고 내말만 옳은 것입니다. 때로는 알고도 모르고 모르고도 몰라야 좋을 때가 있습니다.<덕>이라는 것이 별거 아닙니다. 때로는 가만히 있는 것이<덕>입니다. 그런데 괜한 입방아를 찧어서 문제를 만듭니다. 판단이 너무 빠릅니다. 그리고 지나보면 그 판단이 잘못되었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함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영역이라면 더욱 조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백성들처럼 앞서 판단하고 비판하며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원망하다보면 그 원망이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고전10장에 보면“저들이 광야에 엎드러졌느니라.”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죄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원망 죄>입니다. 오늘 예레미야 선지자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징계를 받아들입니다. 여러분, 내가 참으면 될 것을 남에게 인내하기를 요구하지 말 것입니다.“네가 참아라, 누가 참아라!”할 것도 없습니다. 내가 참으면 됩니다.“나의 고난을 내가 당하리라.”더는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성숙한 신앙인은 남의 고난을 두고 왈가왈부하지도 않습니다.“벌을 받았다느니... 죄 값이라느니...”하지 말아야합니다. 그건 내가 판단하고 비판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오히려 그것마저도 내 고난으로 받아 깨닫는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서양 속담에<흐르는 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그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역경과 고난의 돌을 치워버리면 일시적으로는 편할지 모르나 우리는 인생의 아름다운 노래를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고난의 때에 위를 바라보는 믿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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