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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집에 살고 싶어라(시 23:1-6; 8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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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문(화란한인교회/23-11-2003)

여호와의 집에 살고 싶어라(시 23:1-6; 84:1-14)

사회가 하도 뒤숭숭하다 보니까 편집증이 늘어가는 것같습니다. 모든 것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심지어 남편, 아내를 의심합니다. 아내가 다른 남자를, 남편이 다른 여자를 좋아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가 어떻게 하더라도 다 의심의 눈으로 봅니다. 사랑의 표현을 해도 눈속임에 불과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모든 것을 의심의 눈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이것처럼 믿음이란 것도 실은 뒤집어진 편집증이라고 부르는 분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모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가정한 상태에서 모든 것들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가정에서 모든 일들에 대응합니다. 그래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만나도 ‘감사합니다’가 튀어나옵니다. 모든 것을 믿음이라는 안경을 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은 편하기야 하겠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믿는 것들은 마음 하나는 편하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믿음 유무를 떠나서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객관적이어야 한다, 객관적이어야 한다’ 라는 말을 많이 해도 사람은 절대적인 객관성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서양이 근대성을 통해 이룩해 놓은 객관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인격적인지, 얼마나 서양중심적인지 끔찍할 지경입니다. 그 철학적인 기반위에서 제국주의가, 자본주의가 탄생했습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가 객관적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해석틀에다가 모든 것을 끼워맞추기를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들을 보고 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은 끼워맞추기를 잘 한다고’요. ‘어쩌면 그렇게 모든 것을 끼워맞추느냐’고요. 모든 사건을 다 믿음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예수쟁이들을 사랑하신다는 관점에서 끼워맞추어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믿는 우리들은 철저하게 끼워맞추기를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철저하게 불신앙의 관점에서 끼워맞추기를 합니다. 무릇 어떤 끼워맞추기가 더 인격적인 것이지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본문 6절은 시편 23편의 대단원의 결말입니다. 양들이 목자를 완전히 신뢰하게 된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양들이 사람들처럼 어떻게 신뢰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만 다윗은 양에 빗대어서 자신이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품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렸듯이 다윗은 이제 무슨 일을 만나든지 믿음의 관점에서 끼워맞추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세뇌당한 것일까요? 단지 마음 편하게 먹어보자고 생각한 결과일까요? 결국 자수성가했으니 그런 낭만적인 소리가 나올 수 있게 된 것일까요?

고지에서 여름을 지나는 동안 양들은 목자와 아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합니다. 목자는 양을 잘 알고, 양도 목자를 잘 알게 됩니다. 그래서 눈만 껌벅거려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단계가 된다고나 할까요?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첫 서리가 내리고 밤 기온이 싸늘해지는 가을이 다가옵니다. 그러면 목자는 저지대의 본부 방목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눈이 내리기 전에 저지대의 본부 목장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양들이 목자와 더불어 예전에 올라갔던 그 길을 그대로 밟아서 내려옵니다. 똑 같은 길을 걷고 있지만 마음이 얼마나 다른지요? 골짜기 길을 다시 통과해서 내려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양들의 태도는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목자가 뒤에서 휘파람을 불면서 양을 앞서 보냅니다. 양들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저지대로 내려옵니다. 저지대로 내려온 양들은 겨울을 보내면서 그 동안 자란 털을 깎습니다. 그 털로 목자는 옷을 만들어 입습니다. 한편 양들은 고지에서 밴 새끼를 본부 목장에서 낳게 됩니다. 그 새끼 양들은 주인의 재산의 든든한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양들은 정말로 아무런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들은 일년동안 목자와 더불어 생활해 보았기 때문에 목자가 얼마나 세심하게 자기를 배려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목자가 얼마나 헌신적으로 자기를 돌보는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본부 목장에서 봄철을 보내는 동안 허기질 때마다 푸른 초장으로, 목마를 때마다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를 받았습니다. 자기들이 연약해서 쓰러질 때마다 일으켜 주고, 길을 잃고 방황할 때마다 찾아주었습니다. 음침한 골짜기 길로 내몰 때에 불안했지만 고지 방목장으로 이끌어서 광활한 초지에서 마음껏 뛰놀면서 여름과 가을을 보내었습니다. 목자가 모든 맹수들과 해충들의 공격도 막아 주었습니다. 이제 겨울을 지내기 위해 본부 목장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제 양들은 목자 한 분으로 만족합니다. 양의 이런 만족한 상태를 다윗은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선하신 분입니다. 착하신 분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착한 일을 하기 위해 애를 쓰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 자체이십니다. 모든 참됨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을 결코 파기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자기 백성의 연약함을 돌아보사 끝까지 붙드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안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신들은 변덕을 잘 부리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비위를 잘 맞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를 보십시오. 신들이 얼마나 많이 변덕을 부립니까? 그 신들의 변덕으로 인해 세상 역사며 인간사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결코 변덕을 부리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거래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을 결코 놓지 않는 분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나의 평생에 선하심이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을 맺지 않으셨습니까? 그 언약으로 인해 다윗은 펑생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며 살았던 것입니다. 고통스럽게 내몰리는 환경이, 시기 질투하는 인생이, 사단의 강력한 공격이 다윗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평생 자기를 따라다녔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졸졸 따라다녔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자기를 따라다녔다고 노래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무자비한 분이 아닙니다. 어떤 분의 표현대로 하나님은 ‘코스믹 사디스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입니다. 다윗의 다윗됨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언약에도 있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기인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연약함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평생 인자를 베푸셨다고, 자비를 베푸셨다고, 긍휼을 베푸셨다고, 은총을 베푸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같이 만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심은 인자하심을 품고 있습니다. 인자가 없는 신실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공허하겠습니까? 반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신실하심을 품고 있습니다. 신실이 없는 인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맹목적이겠습니까? 어떤 사람도 신실함과 인자를 바르게 결합시킬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약속이행을 맹목적으로 강조하는 사람이 인자를 베풀려고 하겠습니까? 자비로움으로 모든 것을 덮으려고만 하는 사람이 약속이행의 중요성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에게서 약속지키심과 인자하심이 같이 만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한 목자되신 주님과 동행하면서 이런 저런 어려움을 겪은 성도들은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른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물론 성도라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가 입술로는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수없이 믿음만한 사람을 의지하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의지한 사람에게 여러 번 실망하면서도, 그러면서 속된 말로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라고 말하면서도 사람 의지하는 것을 버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하나님, 저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저를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한껏 과신하면서 살다가 결국 자기 꾀에 빠지고 마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하면서도 좀처럼 자신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는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신뢰할 수 있는 분이라고요. 하나님만이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라는 것을요.

목자와 더불어 친밀하게 교제한 양들은 목자에 대한 확신 뿐만 아니라 한가지 소망을 품습니다. 그 소망이란 다름아니라 목자의 보호가운데 양의 우리에서 영원히 거하고 싶은 소망입니다. 이제 겨울이 다가왔습니다. 찬 바람이 쌩쌩 불어 옵니다. 사방에는 온통 눈 투성이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따뜻함이 있습니다. 야들이 서로 몸을 부대끼면서 체온을 유지하면서 추운 겨울을 보내는 것입니다.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양들은 본부 목장의 우리에서 평안히 거하고 있습니다. 그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고 싶은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이 소망에 빗대어 다윗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목자와 친밀하기 전에는 양들이 목자 곁을 떠나 마음대로 가기를 좋아했습니다. 이 곳 저 곳을 기웃거렸습니다. 그러다가 지쳐서 쓰러질 때도 많았습니다. 맹수의 밥이 될 뻔도 했습니다. 이제는 목자 곁에 있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다른 양 떼와 더불어 목자의 거느림 속에서 목장을 떠나지 않는 것을 제일 큰 복으로 생각합니다. 참으로 많이 발전했습니다. 자기 마음애로 하던 버릇이 죽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다니던 버릇도 죽었습니다.

그럼 우리가 영원히 거할 여호와의 집이 어디입니까? 우리가 들어가서 영원히 거할 여호와의 집은 천국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도 여호와의 집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그 집이 성전이었습니다. 시편 84편은 바로 이 성전을 사모하는 노래입니다. 아마도 이 시편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면서 성전에 올라갈 수도, 제사를 드릴 수도 없었던 안타까운 심정을 노래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 시편을 노래하던 이들은 여호와의 궁전인 성전을 사모하여 병이 날 지경이 되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성전에 둥지를 틀고 있는 참새와 제비조차 부러운 것입니다. 단 하루만이라도 하나님의 성전을 오르내리는 것이 소원인 것입니다. 호의호식하면서 즐기는 것보다는 성전 문지지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까지 노래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있사오니.” 11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절에서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래서 다윗은 그렇게 성전을 짓고 싶어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교회를 떠나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아니 교회를 떠나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발에 차이고 차인 것이 교회가 아니냐고 말할 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는 교회가 다방보다 많다고 하니까요. 그래서 ‘교회가 이렇게 수없이 많은데 이 敎會 하나 뿐이냐’ 라고 하면서 교회를 수없이 옮겨 다니는 것이야말로 여호와의 집을 떠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성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라고 까지 말했습니다. 성도들이 교회로부터 멀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교회생활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장로승인을 위한 공동의회가 있기는 합니다만 우리가 교회를, 직분자를, 성도를 인간적인 잣대로 판단하는 누를 범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누구 누구는 절대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왜 절대 안됩니까? 자격이 안된다는 말입니까? 우리 가운데 자격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에 직분자의 자격이 나와 있지 않느냐? 그것대로 하면 되지 않느냐? 그 자격은 폼으로 기록해 놓았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것대로 하면 됩니다. 말씀이 기준입니다.

특히 교회직분자 세우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장점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지 않습니까? 집사, 장로, 목사의 임기제입니다. 물론 보완할 점이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무릇 정관은 하나님의 말씀과 배치되어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경쟁해서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정관은 시대의 상황, 우리의 문화에 대한 섬세한 배려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교회정관은 교회의 얼굴입니다. 우리 교회정관이 교회직분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직분자 세우는 것을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직분은 명예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런 유혹을 많이 받는데요, 목사라는 것이 무슨 대단한 자격같이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담임목사라는 말과 임시목사라는 말의 뉘앙스가 얼마나 다릅니까?

오늘 장로승인을 위한 투표는 사람에 대한 평가차원을 훨씬 넘어섭니다. 교회를 세우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몸된 교회를 통해 구원사역을 계속해 나가시기 위해 직분자를 세우십니다. 누가 되느냐, 안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열심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각자가 지체가 되어서 주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몸은 교회당에 나와 있지만 마음은 교회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교회일에는 되도록이면 깊이 개입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일에 깊이 개입하면 마음에 상처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까? 소위 정치꾼들이 어떤 상황을 조장하는 줄 아십니까? 정치혐오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철저한 냉소와 무관심을 조장시킵니다. 그 다음에서 자기들끼리 해 먹는 것이지요. 교회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가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바로 그런 상황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느 누구의 교회가 아닙니다. 목사의 교회도, 장로의 교회도, 집사의 교회도 아닙니다. 우리가 성도라면 주의 몸된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교회를 꼭 품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목자를 잘 따르지 않는 양들이 있을 때 목자가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양 한 마리가 자꾸 한눈 팔고 엉뚱한 곳으로 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양들이 그것을 본받아 덩달아 따라갑니다. 그러면 목자는 중대결단을 내립니다. 목자는 그 양의 다리를 부러뜨립니다. 속된 말로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리는 것이지요. 목자는 다리를 부러뜨린 양을 내팽개쳐 두지 않습니다. 부목을 대고 붕대를 칭칭 감습니다. 여러 날 그 양을 품에 안고 다닙니다. 그러면 목자와 그 양 사이에 아주 친밀한 관계가 형성됩니다. 이 시간들을 통해 양은 비로소 목자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회복되면 이제 그 양은 더 이상 목자를 떠나지 않습니다. 늘 목자 뒤만 쫄쫄 따라 다닙니다. 소위 말해서 목자의 똘마니가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징계하실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하십니다. 고통이 오면 사람은 두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원망이 늘어가다가 결국에는 괴팍하고 냉소적인 사람이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더욱더 수용적인 사람이 되든지 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통을 통해서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요, 하나님의 섬세하신 배려를요, 이웃을 향한 여유있는 마음을요. 믿음은 뒤집어진 편집증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반으로 해서 끼워맞추기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편 23편이 마무리됩니다. 시편 23편은 양이 목자를, 성도가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는 과정을 그림그리듯이 그려주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시작한 노래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끝마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만나든지 평생 주님 곁을 떠나지 않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주님을 떠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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