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원의 행복 (딤전 6:17-19)
본문
행복은 크게 세 가지 차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차원의 행복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1차원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공부를 하는 것도, 사업을 하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오직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사람들은 1차원의 행복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2차원의 행복은 가족을 위한 것입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자기 가족을 위해서 일생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부모, 남편, 아내, 자녀, 손자, 손녀, 친척을 위해서 피땀 흘리면서 노력을 하고, 그 노력을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하반신 마비가 된 어느 60대 노인이 노환으로 시각, 청각을 모두 잃은 자기 아버지를 30년 이상 지극한 효심을 돌본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일생을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더 귀한 일은 3차원의 행복입니다. 3차원의 행복은 자기 자신도 아니요, 가족도 아니요, 전혀 다른 사람,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 이웃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서 요구하시는 행복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사랑의 2중계명,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중에서 이웃 사랑을 통해서 이 행복을 우리가 진정으로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오직 은혜로 구원해주신 이유도, 이 행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3차원의 행복을 많이, 풍성히 누리시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러한 3차원의 행복을 풍성히 누릴 수 있도록, 디모데전서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7절에서는 디모데에게 부탁하기를, 부한 자들로 하여금 헛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게 하라고 하면서, 18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려야할 진정한 행복에 대해서 권면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라’, ‘선한 사업에 부하라’, ‘나눠주기를 좋아하라’,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습니까? 이 네 가지 권면대로 살고 있으면, 그 사람은 진실로 3차원의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왜 이렇게 사는 것이 참된 행복인지, 바울이 19절에서 증거합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여기서 ‘좋은 터’란 ‘좋은 보화’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곧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고 동정하는 자가 되면, 이 것이 다 미래에 자기를 위해서 좋은 보화를 쌓는 것과 같아서 결국에는 참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무엇인가 행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참된 행복이요 궁극적인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죄사함받고 구원의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진정으로 믿으면, 그 구원의 축복이 결코 자기 혼자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와 동시에 내 안에 예수의 피가 흐르게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 죄씻음을 받고, 그 때부터는 내 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로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 피에는 이타적 유전자가 들어가 있습니다. 내 피로 살 때는 이기적 유전자가 강력히 작용하지만, 예수의 피로 살 때는 이타적 유전자가 강력히 작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웃 중심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남을 섬기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는 지금 예수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1차원의 행복, 2차원의 행복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3차원의 행복으로 나아가서 그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이타적 유전자가 강력히 작용해서 이웃을 위해 무엇인가 행할 수 있어야, 그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인입니다.
3차원의 행복! 이 행복을 놓치지 말고 마땅히 누려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 행복을 끝까지, 주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누릴 수 있을까?
1. 지금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확실히 달라지는 변화 하나는 남이 점점 크게 보여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믿기 전에는 나 자신, 내 가족 밖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예수님을 영접하고나서는 이타적 유전자가 내 안에 들어오면서, 남을 생각하게 되고, 남에게 사랑을 나누어주게 됩니다. 이런 변화가 뒤따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예수를 잘못 믿은 것이고, 설사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기독교를 여러 종교 중에 하나로 생각하고 그저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만 ‘하나의 종교’로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눅 19장에 보면 삭개오 이야기가 나옵니다. 삭개오는 세관장이요 부자였는데 그가 어느 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 혼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을 남에게 나누어주기로 결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의 것을 속여 뺏은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습니다.”(현대인의 성경)
과연 우리에게도 삭개오와 같은 변화가 뒤따르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고도 여전히 내 것을 움켜쥐기에는 더 애를 쓰고, 나 자신, 내 가족을 위해서 정성을 쏟아부으면서도, 막상 내가 받은 복을, 내가 받은 은혜를 남에게 나누어주는 데는 너무 인색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하나님께 복은 더 달라고, 부르짖고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강철왕’으로 알려진 Andrew Carnegie라는 사업가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얼레잡이, 기관조수, 전보배달부, 전신 기사를 거쳐서 후에 세계 최대의 철강회사를 운영했던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철강사업가로 생각하기보다는 자선사업가로 생각합니다. 아마 그가 벌어들인 재산만 생각하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에서 최고의 호사를 누리면서 살아도 남고 또 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 시점에서 회사를 매각하고, 인생 후반부는 자선사업에 몰두했습니다. 2,509개의 공공도서관, 카네기공과대학, 카네기교육진흥재단, 각종 평화재단 건립 등에 전 재산의 90%를 기부했습니다. 평소에 그는 늘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부자인 채로 죽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카네기는 그 말대로 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것을 남에게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카네기는 인간의 일생을 2기로 나누어서, 전기에는 부를 축적하고, 후기에는 축척된 부를 사회복지를 위해서 투자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그 신념을 실천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생 혼자 살다 세상을 떠난 80대 할머니가 전재산 15평짜리 아파트를 동사무소에 기증하고, 그 곳은 지금 불우이웃을 위한 마을빨래방으로 부활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인생의 전반기는 정직하게 땀흘려서 많이 부를 축적하시고, 인생의 후반기에는 그 축적된 부를 이웃을 위해서 아낌없이 나누어주십시요. 많이는 나누지 못하더라도, 예수믿는 사람답게 사랑을 이웃에게 기꺼이 나누고자 할 때, 비로소 3차원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남에게 나누어줄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한 부자입니다.
2. 소외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와 함께 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목사로서 항상 동경하는 삶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 삶은 예수님처럼 소외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와 함께 하는 삶입니다. 그 삶은 분명히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소외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들과 함께 하면서 행복하셨습니다. 곧 3차원의 행복을 누리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는 제자들, 저와 여러분도 그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실제로 예수님처럼 삶을 살아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동기 목사님 중에서 시골 어느 조용한 산골에서 지체장애인 몇 명을 섬기는 분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의 지원을 받아서 사역을 하고 있는데, 그 분 자신도 손가락이 없는 장애인입니다. 동기 목사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동정의 눈길로 보거나 힘들겠다고 여겨질 수 있겠지만, 그 분은 아주 행복하게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울산 어느 마을에 ‘따뜻한 집’에서 치매노인 17명, 장애노인 5명을 돌보는 어느 여성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간호사로 일을 하다가 사명을 받아서, 자신이 전 삶을 병들고 버림받은 무의탁노인들과 함께 살기로 결단하고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올해로 47살인데 결혼도 하지 않고 오직 그들을 돌보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노인들과 함께 앉아서 환하게 웃는 모습을 사진을 통해서 봤는데, 참 행복해보였습니다.
장 바니에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캐나다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나서 해군 장교로 복무했고, 철학을 공부해서 토론토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이웃을 위한 부르심을 받고 교수직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는 1964년 프랑스의 트로즐리 브뢰이에서 정신지체 장애인 두 사람을 섬기는 공동체, 일명 ‘라르슈’를 세웠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장애인들을 다 무관심하고 버렸지만, 그는 두 명의 장애인과 함께 살고 섬기면서, 오히려 그들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진정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장 바니에의 이런 희망과 긍휼의 영성이 후에 헨리 나우웬에게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런 분들처럼은 살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 주변에 소외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들을 바라볼 때, 그들을 별개의 사람들로 보고 무관심하고 피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함께 살아야할 가족’으로 대하고 그들을 섬기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그들을 통해서 변장해서 찾아오시는 예수님, ‘가난한 자로 찾아오시는 예수님’, ‘소외된 자로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조차도 3차원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이 세상을 떠날 때 영생의 주님과 함께 살게 되는 축복을 4차원의 행복이라고 한다면, 그 4차원의 행복을 미리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이 3차원의 행복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3차원의 행복을 경험하는 사람은 4차원의 행복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3차원의 행복을 풍성하게 누리는 교회, 성도들이 되셔서, 우리로 인해서 세상이 밝아지고 천국이 이루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김 충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