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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을 잡는 사람들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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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을 잡는 사람들 (롬 12:1-2)


두레마을 대표인 김진홍목사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신앙자세를 “치병기복신앙”이란 말로 표현했다. 이 용어에는 두 가지 문제가 담겨 있는데 첫째는 기복주의요 둘째는 이적주의다. 신앙의 중심을 기복과 이적에 두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신앙자세는 결국 탐심을 가리키는데 사도 바울은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했다.

신앙을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삼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세상 사람들에게 짖밟히게 되고 지탄의 대상이 된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거룩한 성도들이 도리어 부정과 부조리한 사건에 연루되어 세상을 혼란케 하는 요인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점점 더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현상들이 심화되고 있는가?
가장 큰 이유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삶의 원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로마서 12:1에서 “그러므로”라는 결론을 이끄는 접속사로 말씀을 시작하고 있다. 이 접속사는 로마서 전체를 둘로 나누는 분수령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구원에 관한 교리에 대하여 설명하였고 12장부터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성도의 실천적 삶에 대한 구체적 교훈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1-2절의 말씀은 12장 이후 16장까지 그리스인의 생활을 다루는 전체 내용의 서론이요 핵심되는 원리라 할 수 있다.

먼저 1절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구약시대의 제사를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신약시대의 예배와 두 가지 면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1)제물 - 구약시대의 제사는 짐승을 제물로 드렸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다.
2)제사의 방법 - 구약시대의 제사는 짐승을 잡아서 드리는 죽은 제사를 드렸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산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 핵심되는 요구사항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삶을 가리키는 것이다. 로마교회 성도들의 거룩한 삶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요, 이것이 거룩한 산 제사요, 또한 이것을 영적 예배라고 부르는 것이다. 미국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는 이것을 삶의 예배라고 했다. 이것은 당시 로마교회 성도들에게만 요구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반드시 지켜야 할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본 자세라는 것이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는 곧 예배의 실패였다. 성전에서의 거룩함을 지나치게 강조 - 성전 안에서의 경건함이 성전 밖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같은 형식적 종교인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믿음은 있지만 삶이 따르지 않는 신앙은 결국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우리의 삶이 거룩하게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을 원하신다.

초기 교회시대의 교부였던 크리소스돔은 산 제사의 삶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의 몸이 어떻게 산 제사가 될 수 있는가? 눈은 악을 보지 않으면 제사가 된다. 혀는 비루한 말을 하지 않으면 제사가 된다. 손은 죄를 짓지 않으면 번제가 된다. 그리고 그것 이상에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여야 한다. 손은 구제하고, 입은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귀는 여가 있는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그것은 산 제사가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가?
“어휴, 나는 못해. 목사님이나 그렇게 사세요. 그냥 나는 적당히 죄도 지으면서 회개하면서 살래요.”
동정이 가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은 삶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이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는 당시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이런 말씀으로 위로했다.
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이제 2절의 말씀을 보겠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거룩한 산 제사, 곧 영적예배”를 드리라고 명령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있다. 이제는 그들이 거룩한 산 제사, 곧 삶의 예배를 드리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어떠한 삶이 산 제사로 드리는 삶인가?

1.이 세대를 본 받지 않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방인들이 죄에 대하여 열거했었다.
롬1:27-31,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방인들의 삶 속에서 나타난 죄의 성향들을 거론한 것이다.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는 말은 그 악한 세대의 양식을 쫓아 가지 말라는 뜻이다.

시대적 조류를 잘 반영하는 매체가 매스콤이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영화나 텔레비전의 드라마일 것이다. 요즘에 방영되는 드라마의 주제는 불륜과 이혼, 그리고 재혼이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회적인 파장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만 있다면 자식도 버리고 친구도 버릴 수 있는 세태를 보여 주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한탕주의, 쾌락주의, 황금만능주의가 지배하고 있다. 시대적 탁류에 휩쓸려서 쫓아다니다가 성공하면 사람들은 그를 우상처럼 떠 받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 수가 없다. 이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사악한 시대의 흐름을 거스려서 진리를 따라 올라 가는 사람들이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권면한다.
요일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2.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되는 것이다.

마음은 그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 자세와 행동을 주관하는 기관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을 누가 주장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달라지게 된다. 신학자 루이스 뻘콥은 인간의 마음은 신앙의 좌소라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 마음 속에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내주하고 계신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것이 되었으면 그 새 것이 된 상태가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남과 함께 다 낡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새롭되는 유일한 존재는 거듭난 영혼이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새로워질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엡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날마다 청소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는 날마다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옛 사람의 습성들을 벗어 버리고 의와 진리로 덧 입어야 한다. 신자의 변화는 돌발적이지 않다. 말씀과 기도와 성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점진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경건의 능력은 신앙연조나 직분에 달린 것이 아니다. 하루 하루 진리를 따라서 살고자 하는 결단과 기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기도 없는 신앙생활은 비 없는 구름과 같고, 말씀 없는 경건은 핸들이 고장난 자동차와 같다. 우리의 심령은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삶이 되는 것이다.

3.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다.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표시이다. 영적으로 어린아이의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낼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명령하셨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의 상식과 경험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접어 두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졌다. 놀랍게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는 밤 새도록 얕은 곳에서 그물을 던졌었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은 이상하리만큼 잡히질 않았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얕은 해변가에서 계속 그물을 던졌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겠는가? 그는 계속 헛수고를 반복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관계 없는 열심은 낙심과 탈진을 가져오게 된다. 우리가 무슨 일에든지 열심을 내야 하겠지만 열심을 내기 전에 먼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 먼저 분별해야 한다.

그 분별력은 어떻게 생기는가? 강물이 탁하면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심령이 어수선하고 육신적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앞서서 언급한대로 첫째는 이 세대를 본 받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 경건에 힘쓰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영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 예배요 몸으로 드리는 거룩산 산제사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세대를 본 받기를 거절하고 이 세대 속에서 빛나고 아름다운 증거를 남겼던 미국의 한 크리스챤의 얘기를 하고자 한다. 예)제롬 하인즈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주를 위해 일생을 사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적당히 살면되지 꼭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사도 베드로는 구원받은 성도의 신분과 역할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했다.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유원지에 가면 두 세 사람이 탈 수 있는 가늘고 긴 보트가 있다. 이 보트를 탈 때 허리를 굽히고 가능한 무게의 중심을 아래로 몰리게 해야 한다. 만약 뻣뻣히 서서 탄다든지 모서리 부분에 앉는다면 배는 중심이 흔들려 뒤집히고 말 것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배의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해야 한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그 역할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함께 탄 사람도 물에 빠지고 말 것이다. 성도는 세상이 뒤집혀서 망하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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