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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역할의 진리 (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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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역할의 진리 (마 5:13)


가끔 교인들이 목회자들의 설교를 평가하는 말 가운데 “어떤 목사님은 세상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살펴보면 그런 말이 옳은 말인지를 분별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거의가 다 비유 설교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세상에서 날마다 보고 경험하는 생활 주변의 이야기를 소재로 해서 영적 의미를 깨달아 알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모두 세상 이야기 입니다. 시집가고 장가간 이야기는 열 처녀 비유이고, 농사짓는 이야기는 씨 뿌리는 비유로 나타나고, 양 기르는 이야기는 잃은 양의 비유로 예수님이 설교하셨고, 무화과나무 농장, 포도나무 농장, 연자 맷돌, 누룩 이야기가 있고, 돈 이야기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어부가 고기 잡는 이야기, 불의한 재판관, 부자와 거지 이야기, 잔칫집 이야기, 심지어 이혼하는 문제까지 세상 모든 것을 소재로 해서 설교하셨습니다. 진리 전달의 최대 효과로 활용하신 예수님의 설교를 성경에서 깨닫게 됩니다.

선교사들이 외국에 선교 사역을 하러 갈 때, 제일 신경 써야 되는 일이 그 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의 이해입니다. 그것에 대해 이해를 잘 못하면 선교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문화는 아주 중요합니다. 저희 갈보리 교회 집사님 몇 분이 저한테 말씀을 하신 것이 있는데, 우리 영어부에서는 한국 문화를 잘 모르고 순전히 외국 문화에서만 성장한 청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집사님들이 저한테 오셔서 하신 이야기는 그 아이들이 도무지 버릇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이 버릇이 없느냐고 자세히 말씀을 해보시라고 했더니, 어른의 어깨를 자꾸 톡톡 치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마치 귀엽다는 듯이 그런 행동을 해서 아주 기분이 나쁘다고 하시는 겁니다. 외국에서는 이런 행동이 버릇없는 것이 아니라 버릇 있는 행동입니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저에게 많이 그런 행동을 합니다. 저를 톡톡 치면서 “목사님! 오늘 잘했어! 잘했어!” 하곤 합니다. 처음에는 ‘이 놈들이 버릇없이!’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그것은 그 사회에서 아주 용기를 북돋아주고 잘했다고 칭찬하는 아주 좋은 행동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문화입니다. 만약에 우리 한국에서 여러분들이 자녀들을 야단칠 일이 있어서 야단을 칠 때 자녀들의 태도가 어때야 좋습니까? 보통 고개를 푹 숙이고 쳐다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외국에서는 만약 내가 야단을 치는데 자녀들이 머리를 숙이고 쳐다보지 않는다면‘나는 당신의 이야기는 절대 안 듣겠습니다.’라는 표현이 됩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야단칠 경우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끝까지 쳐다봐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문화를 모르고 설교하다가 큰 일이 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설교할 당시의 유대 나라의 문화 배경은 아주 절대적인 조건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만약에 2,000년 전에 오시지 않으시고 지금 2005년 세상에 오셨다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한국 땅에 오셨다고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비유는 컴퓨터, 인터넷, 핵무기, 영화 이야기, 자동차, 비행기 같은 것들을 비유로 해서 얼마든지 설교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들은 그 당시의 사람들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소재로 선포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비유 설교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소재가 무엇입니까? 소금입니다.

소금을 모르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소금을 소재로 해서 설교하셨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만들어낸 최초의 조미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아주 간단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소금이 지니고 있는 성분을 분석하면 그 의미는 쉽게 풀이가 됩니다. 먼저 예수님 당시 사회의 배경을 설명해야 합니다. 유대 나라는 세계에서 소금이 제일 많은 나라입니다. 사해 바다 전체가 다 소금 덩어리입니다. 물을 떠서 조금만 말리면 다 소금이 되는 그런 나라입니다. 온 세상에 그렇게 소금이 많은 나라가 없을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를 당시 사람들이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사해 바다는 면적으로 봐서 갈릴리 바다보다도 5배 정도 큰 바다입니다. 그러한 기후 조건과 환경 조건이 있어서인지 유대 나라는 소금이 많은데 암염이라는 바윗돌 소금이 많이 있습니다. 롯의 처가 소금 기둥이 되었다고 성경에 나옵니다. 소금 기둥이 많습니다. 이 암염 소금은 유목민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유목민들이 기르는 양들은 다른 짐승과 달리 염분 섭취가 필요한 동물들입니다. 양들을 방목하는 풀밭에다가 이 바위 소금 덩어리를 여기저기 갖다 놓으면, 양들은 풀을 뜯어먹고 나서 소금 덩어리를 열심히 핥아먹습니다. 그래야 양이 건강하고 제 구실을 합니다.

소금이 지닌 성분 가운데 첫째 조건이 무엇이냐?

소금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물질이 된다는 것입니다.

임금님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거지도 필요합니다. 궁중 음식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농부 가정에서도 똑같이 필요합니다. 소금을 필요로 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 사회에서 부분적으로 식품이 모자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슨 전염병이 돌아서 “금년에 수박이 시중에 못나오게 된다.” 이런 때가 있고 “광우병이 돌아서 쇠고기를 못 먹는다.” 이런 때도 있고 “금년에는 태풍이 많이 불어서 사과가 다 떨어지고 오렌지가 다 떨어져서 흉년이다.” 때로는 “고추 값이 오르고 마늘 구하기 힘들다.” 이런 뉴스가 가끔 나오는데 사실 이것들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이런 것들은 일 년 동안 안 먹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소금이 없다면 세상이 뒤집힙니다. 큰일 납니다. 인류의 삶을 어지럽게 만들어 버립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 하신 것은 “너희는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라. 너희가 없으면 세상이 뒤집히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라.” 그런 뜻입니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존재, 어디에서나 필요로 하는 사람, 너희는 그런 사람이 되라”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소금은 그렇게 중요한 물질이면서 값이 싸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매일같이 소금을 먹지만 일 년에 소금 값이 얼마나 듭니까?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소금 값이 비싸서 세상 못살겠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소금이 되라고 하신 것은 싼 값으로 세상을 살라는 뜻입니다. 비싸게 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활 스타일은 고귀하지만 값싸게 사셨습니다. 값싼 것이란 천박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가리지 아니하고 필요한 존재가 되어서 사회에서 버림받은 온갖 무리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세상 문화를 보면, 될 수 있으면 자신을 비싼 자리에 올려놓으려고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값이 떨어질까 봐서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보고 실망한 많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말했습니다. “너희 선생은 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이냐? 왜 그렇게 값싸게 노느냐?” 그렇게 말했습니다.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이 자기 품위 하나도 유지 못하고 천박한 행동반경에서 왜 그렇게 살아가느냐? 뭐 좀 있는가 해서 찾아가보면 떼거리 인생들만 그 주변에 우글우글하고, 나사렛 출신이 그러면 그렇겠지! 거기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천박스러운 사람이 천박스럽게 산다면 정말 천박한 것입니다. 그러나 고귀한 사람이 고상한 진리를 가지고 천박한 인간을 구원하고자 자기 품위를 내려 싼 값으로 처세한다면, 그것은 소금과 같은 고귀한 역할의 생활 철학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봅시다. 저 아프리카 람바레네에 가서 평생을 복음과 의료사업을 하면서 검소하게 살았던 슈바이처 박사를 천박한 사람이라고 누가 말합니까? 웃옷을 다 벗어버린 채 간단한 핫바지 하나를 입고 초라하게 앉아서 물레를 돌리는 간디를 보고 비웃는 사람이 있습니까? 칼카타 빈민굴을 찾아가서 빈민들과 함께 평생을 살았던 테레사 수녀를 보고 품위를 못 지키는 천박한 여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습니까?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고귀하지만 싸게 살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이민을 가서 초창기에 큰일은 아니지만 작은 충격을 받고 오히려 내 목회에 도움을 주었던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잔디밭에서 시작한 개척교회가 100명 모일까 말까한 작은 교회였지만 열심을 가지고 목회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한국에서 큰 목회자가 부흥회를 하러 온다고 신문에 났기에 그 덕을 좀 보려고 한국에다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미국 LA에 부흥회 하러 오신다고 신문에 났습니다.” “응, 내가 가지! 누구야?” “저는 이필재 목사라고 하는데요, 목사님! 부흥회 끝나시면 시간이 좀 있으세요?” “왜 그러는데요?” “저희 교회도 목사님께서 오시는 길에 부흥회 좀 하려고 시간 여쭤보는 겁니다. 하루도 좋고 이틀도 좋고 목사님 사정 따라서 좀 부흥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간은 있는데.” “잘됐습니다. 그러면 끝나시고 저희 교회 스케줄을 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교인이 몇 명이냐?” 그래서 “이제 시작한 개척교회입니다. 100명도 안모입니다.” 그랬더니 “안 간다.” 그러시면서 전화를 ‘탁’ 끊으신단 말입니다. 그때 제가 시험을 받았습니다. ‘부흥된 교회에 부흥회를 뭣 하러 하냐?’ 그래서 그 자리에서 제가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이다음에 대형 교회 목사가 되면 작은 교회부터 부흥회 하러 다니겠습니다.” 아, 그랬더니 그 후로 제가 목회하는 교회가 대형교회가 되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어디서 몰려오는지 구름 떼같이 매주일 수십 가정씩 등록을 하고 그래서 2~3년 만에 5,000~6,000명 부흥이 잘 되었습니다. 제가 그때를 기억하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내가 옛날에 하나님께 작은 시험을 받고 약속기도를 드린 적이 있는데, 내가 대형교회 목사가 되면 작은 교회부터 부흥회 간다고 그랬는데 실천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온 세상에 테이프로 다 나갔습니다. 작은 교회 목사님들이 전화를 계속 하시는데 “목사님! 테이프 들었습니다. 저희 교회는 세상에서 제일 작습니다.” 미국의 ‘루지에나’라고 하는 곳에 계신 목사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곳은 미군 부대가 있어 국제 결혼한 사람들이 와서 사는 한국 사람이 제일 적게 사는 농촌입니다. “목사님! 세상에서 교인이 제일 작은 교회는 저희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오십시오.” 약속했으니 어떡합니까? “네, 가겠습니다. 그런데 교인이 몇 명인데 그렇게 제일 작다고 하십니까?” “저까지 20명인데, 여자가 19명이고 남자는 저 하나입니다.” 국제 결혼한 여자들만 나오는 겁니다. “행복하시겠습니다. 가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공항에 탁 내려서 그 목사를 만나는 순간 나더러 첫마디가 “사실은 12명입니다.” 그것도 8명을 속인 겁니다. 왜 그렇게 8명을 속였냐고 했더니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2명을 놓고 제가 3박4일 동안 열심히 부흥회를 했는데, 설교 제목을 가서 바꿨습니다. 12명이니까 성경에서 12 숫자를 다 끄집어 낸 겁니다. “12 숫자가 얼마나 좋은 것이냐면, 예수님도 12 제자요, 일년도 12달이요, 하늘나라에 가면 12 보좌가 있고 예수님도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시고 12바구니에 거두었고…….” 12라는 숫자만 다 끄집어내가지고 열심히 설교를 했더니, 마지막은 한 100여명이 모였습니다. 그렇게 아주 재미있게 부흥회를 한 적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고귀하지만 낮은 수준에서 생활 할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금의 역할입니다. 소금 값이 음식 중에서 제일 싸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값싼 식품! 너희는 소금이 되라! 그러나 그 값싼 식품은 제일 중요하고 없으면 누구든지 살 수 없는 가장 고귀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로마 교황이 한국에 왔을 때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소록도라고 대답했습니다. 비싼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아니하는 사람들, 문둥병 환자들이 살고 있는 곳인데 제일 존경받는 세계적인 인물이 “내가 그 사람들을 좀 만나보고 싶다.” 그래서 갔단 말입니다.

세번째 이유는, 소금은 맛을 내는 물질입니다.

며칠 전 음식점에 설렁탕을 먹으러 갔더니 거기에 그 음식의 유래에 대해 써 붙여 있었습니다. ‘성종 임금 때 청량리 밖에서 권농일 날 농사짓다가, 모 내다가 임금님과 백성이 다 함께 끓어먹은 국이 이 설렁탕이다.’사실 제일 값싸고 그것이 보편화 되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많이 먹는 그런 음식이 되었는데 제일 쌉니다. 그런데 그 맛을 무엇으로 냈느냐? 소금으로 냅니다. 미국에서 커피로 대단히 성공한 사업가가 있습니다. 그 커피를 어떻게 맛을 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집 가서 커피를 먹으면 맛있습니다. 나중에 그가 발표했습니다. 커피에 적당히 소금을 쳤다고 했습니다. 그것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간단한 진리 하나를 발견해서 커피에 소금을 넣어 끓여서 주니까 사람들이 세상에서 먹어보지 못한 커피라고 해서 그 집이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꾼들을 온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 이유는 그가 그곳에 가므로 그 세상이 살맛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왜 가나안 땅으로 보냈습니까? “가나안 땅에 네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맛있는 인생이 되게 하라. 너는 가서 복을 나눠주어라! 네가 있음으로 다른 사람이 살맛나는 세상을 살게 하라!” 그 뜻입니다.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신 것은 그 곳에 살므로 말미암아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깨닫고 살맛이 나는 인간 회복을 이루라고 하나님이 요나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왜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메시야가 세상에 오심으로 세상이 인간됨의 맛을 느끼라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됨의 맛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지금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갈보리 교회로 보내신 것은 이 공동체에 있음으로 이 공동체가 맛이 나는 것입니다. 맛을 내는 사람! 오늘 말씀에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어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롯을 소돔과 고모라에 보내셨습니다. 롯 때문에 복 받아서 살맛나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롯이 맛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땅은 롯 때문에 저주의 땅이 되어 온 세상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저주 받은 땅으로 짓밟히고 있습니다. 그가 가서 맛을 못 냈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 사도직 제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맛을 잃어버렸습니다. 지금까지도 배반자라고 짓밟히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 가정에서 아기를 낳아 이름을 지어달라고 해서 한 10명은 지어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두 성경에 있는 좋은 이름을 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도 많이 지어주어 성경에도 한계가 있으니 계속 반복되고 어떻게 새로운 게 없어서 농담으로 “아들인데 ‘가룟 유다’라고 지으면 어떨까?” 이런 소리하면 한분도 좋다고 하시는 분이 없단 말입니다. 저주 받은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맛을 못내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이유는, 소금은 제물적 역할을 합니다.

구약 성경에 하나님께 제사지낼 때 소제, 번제 같은 제사 때는 반드시 소금을 뿌렸습니다. 이 부분은 신학적인 의미가 있는데 부정을 멀리하고 정결케 하는 의미로서의 소금 사용입니다. 우리 한국의 음식 문화를 보면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부패 방지용으로 소금에 절여서 먹는 음식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자반고등어, 멸치젓, 조개젓, 새우젓, 김장, 굴비, 짠지, 된장, 간장, 고추장 등의 음식문화가 다 냉장고 없던 시절에 발달했고, 방부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음식들입니다. 마가복음 9장 50절을 보면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 소금은 모든 물질을 하나의 맛으로 연결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4장 6절에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 같이 하라.” 이렇게 말합니다. 열왕기하 2장 기록을 보면 “물이 좋지 않아서 농사도 안 되고 사람이 죽기까지 하는 일이 일어났을 때 엘리사가 기도하고 난 후 물에다가 소금을 뿌려서 그 물을 정하게 하여 그 후 아무 탈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정결제로 쓰였단 말입니다. 레위기 2장 13절에 보면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을 소금을 드릴지니라.” 제사용으로 쓰였단 말입니다. 에스겔서 43장 24절 “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 제물에 반드시 소금을 치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30장 35절에 “그것으로 향을 만들어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케 하고”라고 말합니다. 정결법에 대한 물질이 소금이 되었던 것을 구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소금 정결법 문화는 유대 사회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금은 안하는지 모르지만 엄마들이 옛날에 어린 아기가 태어나면 먼저 소금물로 목욕을 시켰습니다. 정월 초하룻날이 되면 “일 년 동안 부정이 물러나라.”라는 뜻으로 대문 밖에 소금을 뿌렸습니다. 어떤 때 문둥병 환자, 거지, 혹은 부정하다고 하는 사람이 집으로 오면 부정이 물러가라고 소금을 뿌렸습니다. 일본에도 이런 문화는 똑같습니다. 여러분이 가끔 TV에서 스포츠 중계할 때 스모 씨름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시합하는데 처음에는 무엇을 합니까? 소금을 한주먹 쥐고 휙 뿌리고 시작합니다. 신약 시대에는 그런 것이 다 필요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이 부정을 물리치는 제사 의식의 제물이 곧 소금이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하는 것은 “네가 있음으로 방부제가 되고 제물이 되어 세상이 정결케 되라.”라는 뜻입니다. 맛을 내는 소금이 세상에 많이 존재함으로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인데 하나님의 소원은 하나님 백성의 복된 삶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너희는 소금이 되라!” 이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너희는 세상의 보석이 되라!” 하셨다면 세상은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보석은 특정인이나 실력자만 가질 수 있습니다. 보석은 사실상 우리 생활 가운데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그걸 가지고 무엇을 합니까? 이것은 보관용, 장식용으로의 재산 가치를 사용해 유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제일 값싸고 누구나 필요로 하는 소금이 되라고 하신 것이 진리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러한 큰 사명적 삶의 방향을 소금으로 제시하셨는데 그렇게 훌륭한 삶의 구체적 성취는 제일 힘든 부분이 남아있습니다. 소금의 성격입니다.

이것이 제 구실을 하려면 제 몸을 녹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희생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바위 소금 덩어리를 놓고 양들이 핥아먹습니다. 먹을수록 양은 에너지가 생기고, 바위 소금은 녹아서 작아지고 마지막에는 없어지고 맙니다. 어떤 때 바위 소금은 염분이 다 빠져버리고 딱딱한 돌덩이 같은 것만 남을 때가 있습니다. 이 덩어리는 염분이 없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녹지도 않고 돌멩이같이 쓸모가 없어져서 길바닥이나 잔디밭에서 지나가는 사람이나 양무리의 발에 밟히는 역할, 즉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될 뿐입니다. 녹지 않는 소금은 다른 사람의 방해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관계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사랑의 법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네가 있음으로 다른 사람이 행복하여질 수 있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는 불행해지는가? 내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함으로 조건 반사적인 행복이 그로부터 반사되어 행복의 빛이 나를 또 행복하게 하는 파라독스한 진리가 있습니다. 내가 남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길이 뭐가 있겠습니까? 나의 것을 조금씩 조금씩 녹이는 길입니다. 교회가 잘 되었다고 합시다. 그 교회 교인들이 소금 역할 진리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그 교회가 잘 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잘 되었으면 그 나라 국민들이 국가를 위해서 자기 몸을 무엇인가 희생하고 녹이고 있습니다. 대통령부터 국민 모두가 다 이기주의 병에 걸렸으면 그 나라는 될 수가 없고 그런 교회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드는 진리는 소금의 진리 이것 밖에 없기 때문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가 있음으로 세상이 행복하여 지고, 너희가 있음으로 교회가 행복하여 지고, 너희가 있음으로 인류 공동체가 행복하여 지고, 네가 간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복을 분배해 주는 그런 자가 되고, 네가 있어야 행복해. 네가 소금이 되어야 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 한 구절이 있습니다. “인생의 목숨은 초로와 같고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그러니까 ‘나 하나의 작은 희생을 통해서 나라가 설 때는 이슬같이 내가 죽을 수 있다.’ 이런 가사입니다. 사무라이 영화에서 일본 사람들이 죽을 때 마지막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일본말은 모르지만 ‘아! 저 말은 내가 기억해야 되겠다.’하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私は祖国を不名誉にさせなかった. (나는 조국을 욕되게 하지는 않았다.)” 그런 말을 마지막 죽으면서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나는 주님이 내게 주신 나의 사명을 저버리지는 않았다. 내 평생 그렇게 살았다.”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 “되겠습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그 길을 살겠습니다.” 그 결단이 예배를 통해서 여러분 영혼에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왜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는가를 기억할 수 있게 하시고 내가 존재하는 가정과 사회, 교회와 국가의 어느 공동체에서나 이 역할을 잘 감당함으로 나를 통한 하나님의 복이 우리 주변에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진리에 저희들이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 필 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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