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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위하여 (롬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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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위하여 (롬 1:1~17)


예수님의 탄생 사건을 소개한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크리스마스 새벽송을 하던 천사가 베들레헴 목동들에게 예수님의 나심을 알려주면서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하였습니다(눅 2:10-11).

여기서 말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good news)을 우리는 복음(??αγγ?λιον)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사야는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하였습니다(사 52:7). 여기서 말하는 “좋은 소식” 또는 “복된 소식”은 평화와 구원을 공포하는 자이신 예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하여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사람입니다. 그는 인류가 추구하는 최상의 가치인 복음을 알고 나서 그의 삶이 새롭게 되고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빌 3:8). 그는 이 성경을 기록하면서 그 당시 권력과 문화의 중심지요 세계의 수도인 로마를 향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하고 당당하게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대양 육대주 어디에서나 어떤 대상을 향해서든지 복음을 위하여 신명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I. 복음의 사명

본문 말씀 1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종이요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사명 때문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세상의 모든 역사가 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에 따라 진행된다고 일러줍니다(롬 11:33-36). 그중에도 구속 받은 성도들인 경우 예외 없이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에베소서 1:4-5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명은 자기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므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명은 자기의 임의대로 벗어 버릴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마 26:39).

(2)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본문 말씀 5절에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을 했는데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9:15에 보면 처음 그를 다메섹 도상에서 이적적인 방법으로 부르실 때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의 개성이나 이상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듯이 하나님의 요구도 자기의 수용여부에 따르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따라서 사도가 된 것임을 강조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1:1에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이라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에게 소유된 자입니다.

본문 말씀 1절에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종은 자유나 권리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주인에게 속해 있는 자요, 살고 죽는 문제까지 주인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는 자입니다. 로마서 14:7-8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하였습니다.
사명을 인식하는 사람은 그 사명 때문에 자기 인생을 거기에 투자하는 자이며 사명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면서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행 20:23-24).

II. 복음의 능력

본문 말씀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의 경우 대로마제국과 황제를 향하여 그들이 증오하고 멸시하는 기독교와 복음을 대담하게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상품성, 또는 그 가치를 확신하고 자랑할 만하였기 때문입니다.

(1) 복음의 내용

본문 말씀 2절에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증거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3-4절에는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그는 인성을 가지시고 세상에 오신 분으로서 족보상으로는 다윗의 혈통이요 그의 후손입니다(마 1:1).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성을 소유하신 분으로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와 능력을 행사하시는 분이십니다(요 1:1-3).
본문 말씀 16절에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죄와 죽음아래 신음하는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것보다 더 큰 복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구원의 복된 소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행 4:12).

(2) 신비로운 능력

여기 “능력”이라는 말(δυναμι??)의 원뜻은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폭발적인 힘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외부적인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 그 자체가 지니는 신비로운 능력인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힘이란 권력이나 재물이나 인간적인 완력에 의존하는 것이 많습니다. 이런 것은 다 불완전하고 무가치하며 결국 한계를 드러내고 무너집니다. 예레미야 17:5에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음의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적인 능력이며 신비로운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4절에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사람들은 무덤에 장사하고 큰 바위로 그 입구를 막아 놓고 무장한 군인들로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일어나실 때 큰 바위도 굴러나갔고, 무장한 군인들도 죽은 듯이 드러누워 버렸습니다(마 28:2-4). 예수 그리스도 곧 생명의 능력 앞에 그 어떤 세력도 힘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신비로운 복음의 능력이 죽음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자기 백성을 구원에 이르게 하여 줍니다(고전 1:18-22).

(3) 복음 안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의 특권을 나타내는 말로 「그리스도 안에」(in christ)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로마서 8:1-2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래 이방인으로서 복음을 받지 못했을 때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자였습니다(엡 2:12). 그러나 예수를 영접하고부터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요 복음 안에서 하나로 연합된 사람들입니다. 에베소서 2:19에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7절에도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III. 복음의 비전

어느 때나 그리스도인은 환상을 지니고 사는 자입니다.
복음의 사람 바울은 환상의 사람입니다. 그는 이미 세상에 살면서도 셋째 하늘의 체험을 가졌다고 하였습니다(고후 12:1-2). 또한 그는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 환상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께 부름 받는 순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환상에 사로잡혔고(행 9:3-5), 2차 전도 여행을 떠날 때도 드로아에서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았습니다(행 16:9). 그 외에도 감옥에서나 풍랑으로 조난당하는 배안에서나 신령한 눈을 열고 주님의 계시를 접하는 환상이 있었습니다(행 23:11, 27:23).
하늘나라의 환상을 맛본 사람은 답답한 체질세계에 살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하게 될 이상세계의 비전을 간직하고 거기에 도취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 로마 옥중에서 죽음의 날이 임박해 오는데도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하였습니다(빌 3:20).

(1) 생명운동을 전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전개하는 천국운동을 특징지어 겨자씨 운동으로 비유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3:31-32에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마태복음 17:20에는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겨자씨는 작아도 그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죽을 터뜨리고 싹이 나며 큰 나무로 자라서 대지 공간에 가지를 뻗어나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도처에 확산되고 모든 인류의 마음을 석권하며 구원을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이 지니는 신비로운 생명력이 약동하기 때문입니다.

(2) 새로운 창조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전 것이란 죄로 오염되고 부패한 옛사람의 모습을 뜻합니다. 에베소서 2:2에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3절에는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마귀의 종노릇 하던 자요, 진노의 자식으로서 소망 없던 우리가 복음 안에서 전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54에는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으로 변화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지구 위에 어느 곳에나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서는 사람이 변화되고 사회가 변화되며 정치나 문화가 새롭게 바뀌어 갔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인류가 추구하는 최대의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인 것입니다.

(3) 이상적인 나라가 구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을 강론하시면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마 6:33). 17세기 영국의 시인 밀턴(Jone Milton)은 그의 작품 실낙원(失樂園)과 복낙원(福樂圓)을 발표하여 인류의 영원한 희망을 나타내었습니다. 인간의 시조 아담이 사탄과 결탁하여 하나님이 주신 최상의 낙원을 잃어버림으로써 이 세상은 가시 덩굴과 엉겅퀴로 가득찬 것처럼 온갖 죄와 죽음으로 얼룩져버렸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계에 편만하게 될 때 사탄의 세력은 무너지고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회복될 것을 희망하는 것입니다(계 21:1-2).

오늘날 세계의 많은 나라와 민족들이 막강한 군사력과 눈부신 과학 문명으로 자기들이 의도하는 세상을 만들려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칼 쓰는 자는 칼로써 망하느니라”고 하신(마 26:52) 예수님의 말씀대로 더 많은 테러와 전쟁과 재난의 공포만 확산될 뿐 이 땅에 이상적인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게 하여 모든 사람을 서로 공론하며 평화를 누리게 하여 줄 것입니다.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차별이 없는 것처럼 지역이나 계층의 갈등을 해소하고 누구나 다 복음 안에서 화합하며 번영하게 하는 것입니다. (손 상 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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