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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을 채우라 (눅 14: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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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을 채우라 (눅 14:15-24)


기독교는 잔치의 종교입니다. 구원의 잔치, 은혜의 잔치, 소망의 잔치가 있는 곳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가 어떤 곳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 잔치 집과 같다는 것입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교회는 잔치를 배설하고 모든 것을 준비하여 손님을 기다리는 잔치집과 같은 곳입니다.
교회에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피의 은혜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말씀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위로와 도우시는 힘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1. 주님은 초청하십니다.

누군가의 초대를 받는 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행복한 일입니다.
주일의 예배는 주님의 베설하신 잔치의 자리입니다. 영원히 죽어야 할 죄인이 거룩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의 시간입니다. 말씀의 풍성함이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나타나는 시간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늘의 신령한 것과 땅의 기름진 것을 받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왕되신 하나님의 잔치를 기쁨으로 알리는 종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초청하는 말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사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여기 본문에서 “어떤 사람”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이 잔치의 주재자이십니다. 큰 잔치를 배설하고 모두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심부름 꾼입니다. 종들은 다니며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 되었나이다” 라고 심부름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자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심부름을 당당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 우리의 왕 되신 주님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들이라면 이 심부름을 부끄럽게 여기고 말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당당하십니까 부끄러워하십니까? 하나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초청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야말로 복음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 시대는 희망을 잃고 절망에 빠져 처절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이들에게 꼭 복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영국의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님은 “전도하지 않는 죄”라는 책에서 복음을 말하지 않는 침묵은 죄에 해당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반 하우스(Van Haus)라는 신학자는 오늘날의 기독교인을 자폐증에 걸렸다고 까지 말합니다. 자폐증은 좌신경 호르몬 계통의 이상으로 생기는 장애입니다. 자폐증환자는 의사소통을 잘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사귀지 않습니다. 낯선것에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같은 행동을 되풀이합니다. 자신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자해하기도 하고 주의산만합니다. 편식합니다. 과잉반응 괴성을 지르기도 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을 자폐증에 걸렸다고 한 것은 자신이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이며, 나의 소망이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증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강한 질책입니까? 이시간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얼마나 건강합니까? 복음을 증거하지 않으면 마음이 답답하여 못 견딜 정도의 마음으로 불타고 있는 제자입니까?

오늘 복음을 증거하지 못하는 원인 중에는 우리가 구원 받은자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 니다. 구원의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 받은 확신이 없는 것처럼 부끄러운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무엇보다 부끄러운 것입니다.

2. 모든 것이 준비 되었으니

우리는 무조건 데려만 오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준비하고 . . 세상에서 허덕이는, 괴로워 하는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들을 품어 줄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천국이 되고 그들을 초청해야 합니다. 교회가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참 사랑이 넘쳐야 합니다. 누구든지 와도 부담스럽지 않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가족같은 느낌이 들어야 합니다.

어떤 결혼식장에 초청을 받아 갔는데 너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초대장부터 문제입니다. 약도가 틀립니다. 헤메다가 겨우 찾았습니다.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안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차할 곳이 없습니다.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안내하는 사람이 인사를 하는데 인사는 겉치레의 인사입니다. 부조금 챙기는데만 챙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기만 관심이 많습니다. 식당에 들어가 보니 큰 식탁에 한사람씩 앉아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자리 배정해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음식들은 다 맛이 변했습니다. 짜증이 납니다. 오라는 겁니까? 오지 말라는 겁니까? 부조금이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만일 교회가 이런 결혼식장과 같다면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기쁨으로 올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전도할 때 ‘우리교회는 모든 것이 다 준비 되어 있습니다. 오십시오.’하고 당당하게 초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가보니 주차할 공간이 없다면, 애기를 데리고 갔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를 관리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관리해 줄 생각도 조차 하지 않고 있다면, 누구도 아는 척 하지 않고 다 자기들 아는 사람들 끼리 끼리 삼삼오오 뭉쳐서 예기 하고 있다면, 성경책을 찾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면, 식사하고 가라고 붙잡는 사람도 없다면, 식사후 차 한잔 마시자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 준비된 교회라고 볼 수 없습니다.
교회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 곳이라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완전한 준비, 조금도 부족함이나 소홀함이 없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죄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만 오면 마음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는 느낌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날 수 있어야 합니다.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고 평안이 . . 절망이 물러가고 왠지 소망이 . . 낙심이 사라지고 용기가 생기는 곳이라야 합니다.
우리는 많이 데려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집안에 결혼할 대상이 있으면 부모님은 몇 년전부터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혼수감, 집안분위기, 청결 . . . 손님 맞을 준비를 합니다. 모든 가정이 그렇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과연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까?
잔치의 주역은 손님입니다. 손님을 즐겁게 해 줘야 합니다. 손님을 기쁘게 해 줘야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시각으로 “모든 것이 다 준비되었으니 오소서”라고 말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그러나 다 일치하게 거절합니다.

18절을 보면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다 일치하게 사양하고 거절합니다. 아무리 준비를 다 갖추어도 거절합니다. 초청을 받은 자들은 초청을 거절할 자유도 있고 응할 자유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첫 번째 초대장을 받을 때에는 참석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정작 잔칫날에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습니다.
거절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밭을 샀기 때문에, 소를 샀기 때문에, 장가들었기 때문에. . . 그러나 그것은 정당한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핑계일 뿐입니다. 결국 핑계를 대고 갈 수 없으니 용서하라고 변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잔치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거절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이 사람은 부동산에 눈이 먼 사람입니다. 부동산으로 돈을 벌기만 하면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세상을 혼자의 능력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극도의 개인주의자입니다.
이렇게 물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합니다. 밭과 소를 사는 것은 물질주의자들의 표상입니다. 돈 좋아하는 사람들은 돈벌이 때문에 주님 앞에 나오지 못합니다.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기 때문에 . . .
돈의 위력을 말하자면 한마디로 죽은 사람도 살리는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이 있어서 더 오래 살고 돈이 없어서 치료하지 못해 죽어야 하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돈 때문에 살인하고, 돈 때문에 도적질하고, 돈 때문에 사기를 칩니다.

유독... 물질에 붙들린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입만 열면.. 그저 돈... 돈입니다. 우리가 돈 돈 한다고 돈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너무 돈 돈 하다보면 사람이 정말 돌아 버립니다. 그래서 그 눈에는 하나님도 사람도 보이지 않고 돈만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전도하기 쉽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덜익은 고구마’입니다.
세상에서 돈을 싫어하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려운 것입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악의 뿌리가 된다고 . . 물질에 마음이 뺏겨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합니다. 마6:24 “ .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두 번째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사서 시험하러 가야 하기 때문에 잔치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사업이 바쁘고 할 일이 많기 때문에 교회에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소 다섯 겨리는 소 열 마리를 샀다는 것인데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집에 차가 다섯 대나 있는 집입니다. 이 사람은 세상적으로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너무 돈이 많아서, 너무 재능이 많아서, 너무 유명해서 자신 만만하여 하나님 없이도 살아 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매우 자랑스런 사람같지만 불행한 사람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생활이 향상되면서부터 생활 반경이 넓어졌습니다. 더 바빠졌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얼마나 바쁜지 “죽을 시간조차 없다”고 거드럼, 엄살을 부립니다. 그러나 그게 자랑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바쁘다면예배를 빼먹을 것이 아니라 사업의 규모를 줄이든지 다른 사람에게 분담을 해야 합니다.

세 번째의 사람은 “나는 장가들었으니 못 가겠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총각, 처녀때 열심히 교회를 다니다가 결혼을 하면서부터 신앙생활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배우자를 만나고 결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혼은 두 사람이 하나님을 더 잘 섬기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 이런 목적에서 빗나간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또 이런 사람은 쾌락 때문에 하나님을 거절하는 유형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텔레비전을 나의 목자로 삼는 사람 일 수 있습니다. “텔레비젼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붙들어 매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는 아무것도 못하게 하네. 나의 모든 여가 시간을 송두리째 빼앗아가네. 그것은 세상 것들에 대한 나의 지식을 쌓아주지만 하나님의 말씀 공부와는 멀어지게 하네. 그 소리와 영상이 나를 평안케 하네. 비록 내가 백 살까지 산다 해도, 텔레비젼이 계속 있는 한 나는 계속 시청할지니, 진실로 내 인생에는 아무 유익이 없으리로다.”

 앉으면 TV를 보고, 취미생활 즐기고, 친구들과 즐기는 것에 빠져서 교회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세상적인 쾌락과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절제하고 끊어야 되기 때문에 교회 가는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의외로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세상의 재물이나, 쾌락 때문에 영원한 천국을 버리고 영원한 고통의 곳을 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온갖 핑계와 변명으로 교회 나오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천국잔치를 준비하고 초대하지만 핑계하며 거부하고 있습니다.
참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유익한 것인지, 무엇이 독인지 약인지, 무엇이 참 가치 있는 일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참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원자탄이 투하 되었던 히로시마에 “시민 여러분 1945년 8월 6일 오전까지 50키로 밖으로 피난가십시요”라는 경고 방송을 수차례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노아 시대 때에도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은 노아를 통하여 홍수심판을 예고하셨습니까? 결국 방주 문이 닫히고 홍수 심판이 있었던 것처럼 천국 문이 닫힐 때가 곧 옵니다. 간절한 주님의 초청이 사라질 때가 옵니다. 전도도 없어질 때가 올 것입니다.

4. 강권하여 데려오라!!

이처럼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이 잔치에 참석하는 것을 거절하는 보고를 들은 집주인이 대노했습니다. “노하여 종들에게 이르되 거리의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병신들과 소경들을 데려오라!”고 명령습니다. 그리고 종들은 순종합니다. 그래도 자리가 남았다고 보고하자 길과 산울로 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강권한다”는 말은 팔을 비틀어 데려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어코 설득하여’, ‘억지로라도’, ‘최선의 방법을 다하여’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좋은 시설을 갖추어도, 교회 성도들이 아무리 사랑을 준비하고 환영을 준비해도 사람들은 거절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강권해서라도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강권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단의 역사가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단은 한 사람이라도 더 자기의 종으로 삼기 위하여 우는 사자처럼 사람들을 삼키려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며 열심히 전도해야 합니다.
강권해야 할 이유는 사람들이 죄악된 세상에 너무 많이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병들어 있습니다. 굳어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알아서 나올 수 없도록 세상 단맛에 빠져 있습니다. 세상의 인스탄트식 즐거움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더 즐기고 더 즐겁게 사느냐에 몰두하다 보니 영적인 것, 영원한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강권하지 아니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마귀도 의지가 있습니다. 한 번 붙잡은 사람은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마귀가 무당에게 병을 심어주고 그것으로 그 영혼을 묶어 버립니다. 그리고 점쟁이, 강신한 사람으로, 노예로 만들어버립니다.
전도는 마귀와의 싸움이 됩니다. 마귀와 싸워서 이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얼마만큼 끈질기게 강권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강권하는 데에는 마귀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10번 찍어 넘어지지 않는 나무가 없습니다. 10번 20번이라도 찍어서 넘어뜨려야 합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려면 대화를 하기보다는 머리채라도 잡고 끌어내야 합니다. 달리는 기차에 치어 죽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설득할 시간이 없습니다. 옆구리를 발길로 차서 갈빗대가 부러지더라도 살려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충성되고 신실한 종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왜 강권해야 합니까? 시간이 너무 급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일들은 혹시 연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은 언제 닫힐지 모릅니다. 닫히면 열자가 없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내 집을 채우라고 명령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강권하여 데려오라고 말씀합니다. 가난한 자들은 물론 물질적인 가난뿐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마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또 병신들을 강권하여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꼭 육신적인 장애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스스로의 구원을 이룰 수 없는 영적인 장애인을 말합니다. 인생길을 바로 행할 수 없는 사람들, 진리를 바로 볼 수 없는 사람들, 어떤 선행도 할 수 없는 사람들. . .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22:17)
소경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의 기쁨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일의 행복도 알지 못하는 그런 영적 소경된 사람들입니다.

22절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잔치 자리에 들어왔으나 아직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들이 주인에게 고하기를 “아직도 남은 자리가 있나이다” 라고 보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원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다 와서 마셔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명합니다.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길’은 성 밖의 공용도로를 말합니다. 그리고 ‘산울’은 울타리를 말하는데 이것은 성밖의 영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곧 이방인들을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그들이게 기회가 주어집니다. 전에는 소외되고 저주받았던 이방인을 강권하여 데려오라고 . . .
어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 . . 나오라고 한다고 나오나?. . .” “이렇게 유치한 방법으로 꼭 전도를 해야되나?”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신비롭습니다. 고전1:21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시대가 바뀌어도 영적인 갈급함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전도지를 나눠주며 열심히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전도하러 나가서 어느 집의 문을 두드립니다. 3번까지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자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무엇인지 다시 한번 두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시 두드리자 집 주인이 퉁명스럽게 나왔습니다. 그는 많이 말할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 전도지를 주면서 꼭 읽어보기를 청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집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 전화는 바로 전도지를 받았던 사람의 전화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도자를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심한 삶의 회의를 느끼며 자살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지를 읽고 또 읽다가 전도자를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를 만난 것입니다. 전도자를 통하여 그는 새로운 삶의 소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어느때 보다 영적 갈급함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술, 마약, 쾌락 . . 진수 성찬으로 . . 그러나 이것을 채울 수 있는 길은 세상의 물질로 쾌락으로 안됩니다.
어거스턴은 “인간에게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절대 공간이 있다.” 하나님이 채우지 않으면 인간은 여전히 공허함으로 몸부림 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교회성장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주의 명령을 따라 주의집을 채우는 데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임 경 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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