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소망, 사랑 (고전 13:12-13)
본문
: 예용범 목사
본문말씀 : 고린도전서 13장 12절 - 13절
제 목 : “믿음, 소망, 사랑”
모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의 시험 때 일입니다.
개미를 3등분 하면 어떻게 될까요? 하는 질문 앞에
<죽><는><다>하고 답했답니다.
배운 대로 답을 쓴다면
<머리><가슴><배>여야 했던 것입니다.
정답은 아닐지라도 아이들의 관점에 본다면 틀린 답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성경의 계시된 기독교를,
3가지 단어로 정의한다면,
오늘 본문대로 <믿음><소망><사랑>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광신><배타><독선>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틀리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열심히 믿기에 세상에선 <광신>이라고 하며
◉ 다른 종교, 다른 신앙과 타협치 않기에 <배타>적이고,
◉ 진리는 오직 예수님 한분이기에 <독선>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신앙의 본질을 회복해야 됩니다.
잘못 비추어진 우리 신앙의 자태가
◉ 전도의 장애요
◉ 부흥의 저해요
◉ 매력 호감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1) 믿음
기독교는 열심을 강조하나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보다 우월하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생각은 인생들의 뜻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믿음이 없는 열심은,
마치 뿌리 없이 잎만 무성한 나무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네 기독교의 믿음은,
계시에 의한 것이기에 그 가치와 우월성이 열심보다 탁월합니다.
아니, 인간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기에 합법적인 방편입니다.
갈 3:5-6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며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 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이쯤 되니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같고, 또 같아야 됩니다.
옛날의 경우,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의 믿음이 같았고, 그들의 믿음과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같은 믿음이었습니다.
내용도 같기에 사도들이 믿었던 내용으로 우리 믿음을 「신앙고백」하고 있습니다.
○ 만약 믿음의 자태가 다르면 「이방종교」입니다.
○ 내용이 다르면 「이단」인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성경에 의하면 반석 위에 세운 믿음이며,
좋은 믿음이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감 되게
교회 안의 신앙에도 여러 모양이 있습니다.
○ 자기 지식을 좇거나
○ 자기 열심을 앞세우는 신앙이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참 믿음과 별반 차이가 없으나,
시련 앞에서 진위가 구별됩니다.
마 7:25-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예수 믿다가 왜 도중에 포기합니까?
○ 왜 다른 신앙을 선택합니까?
참 믿음을 지니니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 왜 환난 핍박 중에도 「죽으면 죽으리라」고 신앙의 정조를 지킵니까?
참 믿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 왜 말세에는 많은 유혹과 고통의 때가 임합니까?
세상 임금을 벌주고자 함도 있지만,
참 믿음!
참 알곡을 가리기 위함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은 정금이어야 합니다.
그 근거는 성경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보다 아니 믿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엡 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 소망
참 믿음은
○ 구원을 이루고
○ 귀한 역사를 이루며
○ 열매가 나타납니다.
히 11:1-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그 열매가 거룩한 「소망」으로 맺힙니다.
① 예수님을 닮기를 소망합니다.
찬송가 506장
예수 더 알기 원함은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왜 부자가 아니고
왜 위인이 아닌 예수님 닮기를 소망합니까?
「대속해 주신 사랑」으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지옥 갈 인생이 천국 감을 이룬 것입니다.
소망은 사랑의 염원입니다.
주님 사랑하는데 누굴 닮겠습니까?
주님 사랑한다면서 누굴 더 알기 원합니까?
미국의 너 새니얼 호손이 지은 「큰 바위 얼굴」이라는 단편 소설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남북 전쟁 후 어니스트라는 소년은 동네 큰 바위에 새겨진 위대한 인물과 같은 훌륭한 인물이 이 동네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전설을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그 소년은 그 훌륭한 사람을 만나보면 좋겠다고 하며 큰 바위얼굴을 바라보며 자랐습니다.
그동안 부자, 군인, 예술가 정치인 등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한결같이 큰 바위 얼굴에 새겨진 인물들은 아니었습니다.
그 후 세월이 흘러서 어니스트가 설교자가 되어 설교하는데,
그의 설교를 듣던 어느 시인이 어니스트를 보고 「큰 바위 얼굴이다」고 소리칩니다.
결국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은 그 바위 얼굴을 소망하였던 장본인 된 것입니다.
예수님 소망하면,
예수님 닮습니다.
사랑할수록 닮습니다.
○ 인격에서 닮도록 소망합시다.
○ 마음에서 닮도록 소망합시다.
○ 순종하심을 닮도록 소망합시다.
○ 습관 따라 기도하심을 소망합시다.
② 천국을 소망합니다.
찬송가 543장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합니다.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연세대 명예교수 되시는 김동길 교수님의 글입니다.
어느 날, 연세 드신 목사님을 모시고 있는 젊은 목사님께 그 연세 드신 목사님의 안부를 확인했답니다.
「목사님은 평안하신가요?」
그때 젊은 목사님은
「네 목사님은 좋은 음식 잘 드시고 운동 많이 하셔서 건강하십니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순간 김교수님은 연세 드신 목사님이 천국보담 땅의 생활에 집착하신 듯 같아서
「목사님은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답니까?」했답니다.
그러면서 부언하시기를,
천국믿음이 있다는 성도들이 60세에 수술하여 70세를 살고자 하는 것은 아름다우나
70세를 사는 이들이 80세를 살고자 하는 것은 소망 없어 보인다고 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캐나다나 호주를 이민 가고자 한다면
정신과 마음이 그곳을 향합니다.
새집을 이사 가고자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이런 뜻에서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라 너희 마음속에 있느니라」하셨던 것입니다.
3) 사랑
믿음이 천국을 향해서 오르는 「사닥다리」라면,
소망은 그 천국에서 머무는 「영주권」입니다.
사랑은 무엇일까요?
천국생활의 「맛」입니다.
천국에선
믿음도 소망도 다 그쳐집니다.
그러나 사랑만큼은 영원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가
천국생활을 맛보기 위한다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나 성도가
믿음을 갖고 천국을 향하고
소망을 갖고 천국에서 머물 수는 있다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어찌될까요?
스코틀랜드 가정의 표어 가운데는
「봉사하기 위하여 구원받았다(Saved to serve)」란 말이 있습니다.
섬김을 모르는 삶은 사랑 없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
우리가 고침 받은 것,
이 섬김의 사랑을 통해 천국 행복을 누리고 증명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세상은 믿음 없고 소망 없기에 받을 사랑을 계수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줄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