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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예배 / 롬 12: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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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용범 목사
로마서 12장 1절 - 2절
제 목 : "영적예배"


종교개혁이 기독교의 여러 발전을 이룩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만,
그 중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예배』입니다.

종교개혁 이전의 예배는,
무겁고 어둡고, 찬양은 슬픈 가락을 띄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의 예배는,
밝고 명랑하고 찬양은 경쾌해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종교개혁 이전의 예배는
구원의 감격과 감사가 없는 예배자들의 예배인 반면,

종교개혁 이후의 예배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은 감격과 감사가 넘치기 때문입니다.

1) 현대의 예배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떨까요?
● 강압적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있습니다.
단순히 종교적 예배입니다.
또 의무적 예배일수도 있습니다.

● 또한 자원함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있습니다.
예배의 의미를 알고 드리는 것입니다.
또 왜 예배하는가를 하나님의 은혜에다 초점을 맞추고 있는 모습입니다.

분명 같은 장소, 같은 예배 순서를 따라 드려지는 예배일지라도
예배자가 누구냐? 어떠냐? 에 따라 마치 종교개혁 이전의 무거운 죄짐을 짊어진 성도냐?
아님, 종교개혁 이후의 죄짐을 벗어버린 감격 성도냐?로 예배의 모양과 예배의 질이 각기 나타난 것입니다.

● 가인과 아벨은 같은 형제였습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자이기에 곡물로 제사 드렸고,
아벨은 양치는 자이기에 양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혹자는, 이 차별을 제물의 차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각기 직업의 소산물을 따라 드렸던 제사이기에 그 제물의 차이는 아닌 것입니다.

근본적인 차이는,
두 형제의 믿음과 마음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가인은, 때가 되어서 드렸던 의무적인 제사였다면,
아벨은, 감사와 감격이 있는 자원함의 제사였던 것입니다.
아벨의 제물이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창 4:4 "아벨은 작도 양이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아벨이 드린 첫 새끼! 기름! 값이야 얼마 되겠습니까마는 하나님은 그 의미와 가치를 귀한 것으로 여겨 주셨던 것입니다.
유감 되게 이러한 의미가 가인에게서는 발견되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벨에 대하여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결국 가인에게는 아벨과 같은 믿음! 감사! 자원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물보다 더 심각한 일이 발견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만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가인이라는 예배자! 곧 그 인격 자체를 거부하셨으며,
반대로 아벨의 인격과 그 제사도 받으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가인은 제사는 있었으나 삶과 인격이 없었던 것입니다.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결국 하나님의 경고와 지적대로 동생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들의 예배! 어떤가요?
의식적으로만 드리는 의무적 예배인가요?
아니면 은혜의 빚진 자로서 늘 갚아도 갚을 수 없기에 이 몸을 드립니다 하는 심정의 감사와 감격의 예배인가요?

우리는 오직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더 나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기에
아벨과 같은 예배자!
아벨과 같은 제물이 있고자 힘써야 됩니다.

2) 예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예배자에게는 은혜가 되는 거룩한 의식입니다.

한번의 예배일지라도
이 예배 잘 드려서 흥하고
잘못 드려서 망했다면 믿겠습니까?

● 성공자로써는 솔로몬을 꼽을 수 있습니다.
천 번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소를 제물로 드렸으니 수고와 지출은 컸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 지혜를 주시고 구하지 않았던 부귀와 영화도 주셨습니다.

● 실패자로써는 아론의 두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분향하였다가 죽었습니다.

● 또 엘리제사장의 아들들입니다.
삶는 제물을 먼저 꺼내 먹다가 집안 전체가 죽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카인과 같은 예배자와 예배는 거부하고 계시며
아벨과 같은 예배자와 예배를 받으십니다.

왜 왕 같은 제사장이라 하셨는지 아시겠습니까?

삼상 2:30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 종종 어느 교회를 갔더니 예배가 살았더라, 혹은 죽었더라 하는 말을 듣습니다.
또 미국의 어느 교회의 예배는 진한 감동과 은혜를 받았는데 한국의 교회에서는 그렇지 못하더라고 푸념을 합니다.

잘 본 것입니다.
그래서 소의 『예배갱신』도 외쳐댑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배갱신은,
예배실을 새롭게 하거나 낡은 악기를 좋은 것으로 교체하고 예배 순서를 늘리고 줄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녕 예배자가 바뀌어야 합니다.
● 구경하는 예배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예배하는 예배자로 거듭나야 됩니다.

● 하나님께 받기를 바라는 예배자가 아니라 드림이 있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 한 시간을 예배하기 위해서 한 주간의 삶을 준비하는 예배자여야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보다 예배자가 중요합니다.

요 4:23 "~ 아버지께서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시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여러분은 하나님이 찾아주시는 예배자이고 싶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가 열납 되길 바랍니까?

그렇다면 본문에 유의하십시오.
① 변화를 받으십시오.
성령의 사람이 되십시오.
성령님은 『뒤나미스』입니다.
다이너마이트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을 모신 성도는 수류탄이고,
그 성도들이 모인 교회는 화약고이며,
그들이 드려지는 예배는 화약고의 폭발 같아야 합니다.

이 폭발력은 강력하여서
로마의 박해, 히틀러, 일제, 공산주의를 이겨냈습니다.
가난도 이겨냈습니다.
이제는 말세의 인본주의와 자본주의의 물질주의와 현대의 분주함과 피곤함도 이겨내야 합니다.

무슨 얘기인가요?
먹고사는 일에 핑계대지 말고
예배가 중심이요 으뜸 되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② 삶이 거룩해야 합니다.

롬 12:1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성도는 주일날만의 예배자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또 예배당 안에서의 예배자는 부족합니다.
일상의 삶이 진실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입술의 찬양도 드려야 되지만,
그 찬양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삶 속에서 하나님 찬양을 이룩해야 됩니다.

모 성구사 사장 장로님은 찢어지게 가난할 때 심장병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40만원이 없어서 죽어갈 판이었습니다.
그때 누군가의 도움으로 수술 받아 살아났습니다.

그후 임장로님은 생활형편이 나아지자 40만원을 들고 세브란스병원을 찾아가 담당의사에게 내밀었습니다.
의사는 웬일이냐고 물었죠!
그때 40만원이 없어서 죽을 뻔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런 환자들이 없으란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긴급하게 돈 없는 환자가 오면 누구라도 좋으니 거절 마시고 이 돈으로 고쳐주십시오.

그후 장로님은 매년 심장병 환자 1명을 도와주고 계십니다.

영적인 예배!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 받은 성도들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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