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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강해(제2강) 심령이 가난한 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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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ksk 작성일15-08-20 23:19 조회8,3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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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강
심령이 가난한 자⑵
마 5:1~12
    지난 수요일에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하여 생각했는데, 주로 당시 상황에서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 상황에서 그 청중들의 상황을 놓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오늘은 지난번 생각한 말씀을 생각하면서 현재 우리의 상황을 놓고 좀 더 생각할 바를 생각하겠습니다.

○마 1~5장까지의 요지
    여기 산상수훈이 기록된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구약 성경을 많이 인용합니다. 복음서는 다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 특히 그분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복음서의 중심 내용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약이 말하고 소망하던 ‘그리스도’라는 것이 사 복음서의 중심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제시하는 방법은 복음서마다 약간씩 다릅니다. 마치 어떤 사건이 일어났으면 그 사건을 바라보는 기자들마다 약간씩 달리, 같은 사건이지만 달리 기록하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는 것에 대한 것을,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기록하는데 사 복음서 기자들마다 약간씩 달리 기록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구약 성경을 아주 많이 인용합니다. 구약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생애 또 사건을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드러냅니다. 독자들에게 복음서 중심 내용을 돋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까지는 그리스도께서 ‘왕’인 것을 잘 드러냅니다. 하나님 나라를 가져온 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니까 하나님이지요? 천국의 왕은 예수님인데, 예수님은 하나님이지요. 그럼 백성은 누구냐? 자신이 이제 곧 십자가에 죽으실 텐데, 그 십자가에 죽으면서 구원할 자들이지요? 그런 백성들의 왕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잘 볼 수 있어야 하지요? 그분의 가르침을 잘 듣고 깨달으면 하나님을 잘 알게 됩니다. 우리가 천국 백성 노릇을 잘하려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잘 깨닫고 순종하면 됩니다.
    4장까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의 왕이신 것을 드러내셨는데, 이제 5장부터는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직접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 또 그 나라에 속한 언약 백성이 어떤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7장까지 말씀합니다. 이것이 산상수훈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셔서 천국 백성이 어떤가? 어떤 삶의 내용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것을 설교한 것이기 때문에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팔복을 이해하기 위하여
    산상수훈 중에 앞에 나오는 8복의 뜻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제일 먼저 나오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한 말씀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을 보는 방식과 비슷합니다. 시편 1편이 시편 전체의 서론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1편을 잘 이해하면 시편 전체를 이해하기 쉽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여기 팔복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는 이것이 8복 전체의 서론입니다. 그래서 이 심령이 가난한 자를 잘 이해하면 팔복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첫 번의 문제를 좀 더 생각하지요.
    팔복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고 둘째, 이 팔복이 누구를 상대하여 말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 청중들, 즉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그 밖의 청중들 앞에서 설교하신 것인데, 그 청중들 모두를 상대한 것인가? 지난번에 생각했듯이 아니라고 했지요? 모든 청중을 보시고 천국 복음을 설교하셨으나 예수님께서 염두 하신 것은 청중들 중에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지요? 자신이 곧 십자가에 죽으실 텐데, 그 죽으시면서 십자가에 공로를 나타낸 것을 알고 믿는 성도들, 그리스도와 신령하게 연합한 교회를 염두하고 설교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팔복을 읽을 때 교회를 이루는 성도를 염두하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도 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이런 면 저런 면을 묘사하신 것입니다. 팔복은 성도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심령이 가난할 수 있고 애통할 수 있고, 온유할 수 있고,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 백성 된 자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이런 저런 면을 나타낸다는 것을 놓고 ‘복이 있다!’ 하고 선언합니다. 감탄문이지요? 가난하면 천국이 주어지고, 애통하면 위로를 받고, 온유하면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기원이 아닙니다. 팔복은 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교회를 이루는 성도 한 사람이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저런 면이 나타나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직접 듣던 당시 청중들은, 아직 예수님을 믿고 성도가 되지 아니한 자들에게는 미래의 일이니까 ‘약속’이라고 할 수 있지요? 성도에게서 살아가면서 나타나는 일이니까 지금 설교를 듣는 청중들은 앞으로 이루어질 것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되지요? 그러나 이미 교회를 이루고 성도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놓고 ‘복 있다!’ 하고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참 성도란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할 뿐 아니라 애통하는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 성도는 애통할 뿐 아니라 온유한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팔복의 말씀은 천국 백성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조금씩 다른 관점에서 묘사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셋째, 팔복을 이해하기 위하여 팔복이 다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지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것인데, 이쪽 면 저쪽 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마치 한 나무에 이런 저런 가지나 열매가 있는 것과 같이 팔복은 유기적으로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팔복의 중심 사상ㆍ주제
    따라서 팔복은 하나의 통일된 주제와 중심사상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심령이 가난한 자”와 여덟 번째 나오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10절)는 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후렴구가 있지요? 내용상 서로 통합니다. 즉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이 세상에서 의 때문에, 즉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 때문에, 천국 백성답게 살려는 것 때문에 10절의 “핍박을 받는 자”입니다. 처음과 마지막이 반복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 말한 것을 마지막에 또 말하고 또 처음으로 돌아가는 이런 반복된 구조는 팔복 전체의 통일성과 중심 주제를 부각시킵니다. 이것은 11절에 다시 결론적으로 요약하는 데서도 알 수 있는데, 11절에 보면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하고 결론을 맺습니다. 여기 11~12절의 말씀은 앞에 3~10절까지의 말씀을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3~10절까지의 내용은 시적인 형태입니다. 시적인, 운문형태의 말씀인데 다시 산문형태로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 11~12절의 말씀입니다. 그럼 이 팔복의 중심사상이 뭘까요? 팔복을 이야기한 다음에 11절에서 결론적으로 말씀하는 데서 찾을 수 있는데, 무엇일까요? 무엇이 중심 사상, 중심 주제일까요? 천국 백성이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핍박’입니다. 특히 11절을 보면 알 수 있지요? 11절은 앞에 3~10절까지의 결론입니다. 이 결론적으로 풀어서 말하는 것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 때문에 성도들이 당하는 핍박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팔복은 한마디로 ‘핍박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핍박’이라고 하면 요즘 성도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로 믿고 살아가려면 핍박은 피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12)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12. 이 팔복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도들은 나중에 예루살렘교회를 이루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많이 받았지요? 사도행전 5:41에 보면 사도들이 붙잡혀서 채찍질을 당할 때 “...그(예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또 자신이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14)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팔복은 성도들이 이 땅에 살아가면서 당하는 일을 말씀한 것인데, 중심 사상은 ‘핍박복음’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복
    원문을 보면 이 팔복은 “복이 있나니”가 제일 먼저 나오는데, 그러나 예수님께서 ‘복이 있나니’ 하고 그 ‘복’에 대하여 그 복이 무엇인지 잘 설명하고 하지 않습니다. 복이 무엇인지는 사람들이 다 알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것이 복이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지만, 좋은 것이고 잘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복을 가지고 청중들의 관심을 끌면서 말씀하시는데, 먼저 ‘어떤 자’가 복이 있는가를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등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는 했지요.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복과는 아주 거리가 먼,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무슨 복이 있습니까? 애통하는 자가 무슨 복이 있습니까? ‘부자는 복이 있나니...’ 또는 ‘웃는 자가 복이 있나니’ 하고 생각하잖아요? 그렇게 말씀해야 할 텐데,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 반대의 말씀이지요? 심지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하고 말씀하니 너무나 뜻밖입니다. 청중들은 아마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의아해하며 듣는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끝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다 듣기는 했는데, 그러나 청중들 구미에는 전혀 맞지 않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본래 설교란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 구미에는 잘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설교를 하신 의도는 그리스도의 지체들, 성도들, 당시 청중이라면 그중에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구성할 성도들만이 들을 수 있도록 의도된 것입니다. 그것이 설교입니다. 사람이 예측할 수 없는 뜻밖의 화법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시고,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시고, “왜냐하면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아주 불쌍하고 가련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복이 있는 이유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보상’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보상을 주시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 세상의 복은 내가 소유함으로 얻는 복이지요? 세상 사람들이 ‘아, 그 사람 복 받았다’ 하면 그 사람이 무엇을 소유했기 때문에 ‘복 받았다’ 하지요? 예를 들어서 내가 좋은 집을 하나 장만을 했으면 참 기쁘지요. ‘복 받았다’ 할 만합니다. 그런데 그 복은, 기쁨은 그 집을 소유했기 때문에 오는 거지요? 기쁨의 원인은, 복의 원인은 내가 소유한 집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집이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없어져버리면 나의 기쁨도 복도 없어지고 맙니다. 이런 것은 세상 사람들이 즐겨 노래하는 연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연인이 떠나가든지 죽으면 그와 함께 기쁨도 사라지고 맙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목숨을 다 바쳐서 마치 하나님처럼 떠받들고 섬기던 연인도 변하거나 떠나거나 하면 절망에 빠져서 아무 것도 못합니다. 저주를 받은 것처럼 됩니다. 기쁨의 원인이 그 대상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권력이나 부귀영광, 명예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공부하는 우리 아이들도 잘 자라야 하는데, 성적 자체가 기쁨, 복이라고 생각하면 그 성적이 떨어지면 절망하고 말지요? 유일한 대상이 성적이고 그 성적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니까 성적이 좋을 때는 기쁘고 복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조금이라도 내려가는 날에는 저주와 같이 생각하고 절망하고 맙니다. 요즘 중고등학생들이 자살하고 하는 것은 다 이런 면들 때문입니다. 물론 거기에 크게 기여한 건 부모들입니다. 부모들이 그 성적에, 아이들이 줄서기 하는 그 성적에 전부를 걸고 키우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복은 다 그 대상을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 대상이 없어지면 복도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여기 팔복에서 말하는 복은 그런 대상에 의존하지 않지요? 도리어 대상은 사람에게 설사 가난을 가져다주고 우리가 싫어하는 애통을 가져다줄지라도 이것을 복이라고 하고 이것을 보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고 갚아 주시기 때문에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의 근원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복은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기 때문에 가난이 와도 애통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복을 소유한 사람은 어떤 일을 만나도 낙심치 않고 좌절치 않습니다. 어떤 악조건 하에 있어도, 잠시 주저하고 침체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낙망해 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악조건 하에 있어도 그 일을 보시고 갚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말씀하신 여기 복을 소유한 사람은 하박국 선지자처럼 노래할 수 있습니다. 찾아볼까요? 하바국서 3장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하박국서를 배웠는데요, 하박국서 3:17~18을 같이 읽어보지요.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것이 하박국 선지자의 찬송입니다. 이 하박국 선지자가 처해 있던 상황은 찬송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자기 나라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김으로 하나님께 언약의 징계를 받아서 이방 나라에 포로로 끌려갈 상황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팔복에서 말하는 복이 있기 때문에 자기 나라가 비록 언약의 저주를 받아서 이방 나라에 포로로 끌려갈지라도 주님을 찬송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본문으로 돌아와서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여기 “심령이 가난한 자”란 단지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생각했지요? 그런데 옛날 로마교회는 ‘물질이 없는 자’로 해석하여 ‘자기 재산을 다 버리고 자의적으로, 스스로 가난을 서약하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사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교부들 중에도, ‘교부(敎父)’란 ‘교회의 아버지’란 뜻인데요, 사도들이 죽은 다음 그다음 시대, 약 2~3세기쯤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한 사람들이 교부라고 합니다. 그들 중에 ‘자기 스스로 가난하게 된 자’가 복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민중 신학 하는 자들도 ‘물질적 의미에서 가난한 자들’, 곧 예수님 당시 갈릴리의 가난한 농부들과 어부들이 복 있는 자로 생각했습니다. 단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여기 “심령”, ‘프뉴마’라고 하여 직역하면 ‘바람’ 혹은 ‘영’ 또는 ‘성령’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란 ‘영에 있어서 가난한 자’, 혹은 ‘영적인 의미에서의 가난한 사람’을 뜻합니다. 가난한 자 앞에 ‘영’이란 말을 붙인 것은 문자적인 의미로, 즉 경제적인 의미로 생각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냥 ‘가난한 자’라고 해도 될 텐데  그렇게 하면 오해해서 단지 ‘춥고 배고픈 사람’, 이렇게 문자적으로 받아들일까봐 앞에 ‘영’이란 말을 붙였습니다.
    물론 지난번에 본 것처럼 평지설교를 한 누가복음 6:20에는 그냥 “가난한 자”라고 했지요? 그러나 그것도 단지 문자적인 뜻으로 ‘가난한 자’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물론 당시 가난한 자, 업신여김을 당하는 자의 그런 뜻이 거기에 스며들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힘이 없어서 부자와 권세 자들에게 멸시를 받고 압제를 당하고 고통 받는 모습이 거기 ‘가난한 자’의 말에 투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가난한 자’란 말을 사용하셔서 ‘영적인 의미에서의 가난한 자’의 개념을 제시하셨습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에 ‘심령’이란 말이 없어도 단지 문자적인 의미를 생각하면 안 되고 그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영적 의미에서의 ‘가난한 자’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합니다.

○구약에 나타난 ‘심령이 가난한 자’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설교하시면서 ‘가난한 자’를 말씀하신 것은 이미 구약 시대에 많이 사용되었던 용어를 빌려서 쓰신 것입니다. 여기 말고 마태복음 11:5에도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셨고, 또 누가복음 7:22에도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한 말씀은 다 구약 이사야 61:1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한번 찾아보지요.
    이사야 61:1 다같이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기 “가난한 자”가 오늘 본문의 팔복의 ‘가난한 자’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물론 히브리어고 헬라어의 차이가 있는데 그 히브리어를 신약의 헬라어로 고치면 똑같은 단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고한 ‘가난한 자’를 성취하시면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가 예고한 ‘가난한 자’는 성도에게 나타나는 면을 말하는 거지요?
    또 시편에서 ‘가난한 자’란 말을 많이 썼는데, 지난번 113편을 생각할 때도 ‘가난한 자’가 나오지요?(7절) 이 시편에서 가난한 자란 말을 쓸 때 ‘궁핍한 자’(시 35:10, 40:17, 69:33, 70:5, 74:21 등) ‘외로운 자’(시 10:8, 10, 14 등) 혹은 ‘압제 당하는 자’(시 9:9, 10:18, 74:21 등)와 문맥상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또 ‘주를 바라는 자’ ‘주를 찾는 자’ ‘주께 피하는 자’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 ‘여호와께 부르짖는 자’ 등의 표현과 함께 자주 나타납니다. 이런 표현들은 다 성도의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시편에 ‘가난한 자’에 대한 많은 용례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69편입니다. 잠깐 찾아보지요. 시편 69:29부터 보지요. “(29)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또 내려가서 32절에 “온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지어다 (33)여호와는 궁핍한 자를 들으시며 자기를 인하여 수금(갇힌)된 자를 멸시치 아니하시나니.” 여길 잘 보면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단어가 나오지요? 팔복 중에 네 가지가 그대로 나타납니다. 29절에 “가난한 자(궁핍한 자)”가 있고 또 “슬프오니” 하는데,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라고 하셨지요? 또 32절에 “온유한 자”도 팔복에 나오지요? 또 33절에 밑에 보면 “수금된 자”를 말했는데, 이것은 팔복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와 같은 말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69편의 이 부분을 ‘구약의 팔복’ 혹은 ‘사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34절에서 36절을 읽어보면 ‘유다 성읍들’이 나오고 ‘소유’가 나오고 ‘상속’이 나오고 ‘거함’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런 말을 사용함으로써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상급이 있을 것을 말합니다. 즉 여기 ‘유다 성읍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가서 거할 장소로서 팔복의 ‘천국’과 상통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고 의지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상급입니다. 따라서 시편 69편은 산상보훈의 ‘팔복’과 일치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신약의 예수님께서 팔복에서 시편 69편의 실체를 드러내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에서 ‘가난한 자’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주위의 악한 사람들로부터 괴로움을 당하며 학대받고 압제 당하는 자, 그리하여 그 마음이 슬프고 외로운 자,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의 도우심을 바라고 기다리는 자, 이가 시편에 나타난 ‘가난한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이런 ‘가난한 자’를 생각하시고 산에 오르셔서 짤막하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따라서 팔복의 “가난한 자” 역시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에게 핍박과 환란을 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참 신자들이지요? 핍박과 환란을 당하면서도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성도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던 청중들에게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앞으로 성도가 될 자들에게 지금 약속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루살렘 교회를 이루고 사도 이후 교회에서 이 말씀을 설교하실 때는 성도를 가리켜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가난한 자’는 철저하게 믿음의 사람이고 기도의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주님만 신뢰하는 자들입니다. 시편 용어로 말하면 주님 때문에 가난하게 된 자들입니다.

○천국이 저희 것
    본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주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 까닭은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주님을 따르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가난한 우리에게 큰 위로의 말씀을 하십니다. 참 믿음을 지키고 주님만 신뢰하고, 주님의 교회를 마음을 다하여 이루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성도가 복이 있는 까닭은 천국이 이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가난할지라도 즉 주님을 따르고 순종하기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너는 뭐 그렇게 믿어! 유별나게 그렇게 믿느냐, 적당하게 믿지 무슨 그렇게 바보같이 믿느냐!’ 하고 조롱을 맛 퍼붓는 일을 만날지라도 우리는 복된 자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우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인식을 새롭게 하십니다.
    천국이 누구의 것인가?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가난하게 된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비록 환란을 당하고 압박을 당하나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소망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천국’을 복으로 주십니다.
    한 곳을 찾아보지요. 마가복음 10:29~30을 같이 읽지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주님을 믿고 사는 성도는 그 신앙을 지키고 살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가난합니다. 핍박을 당하고 곤란을 당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천국의 복이 임합니다. 나아가서 내세에는 낙원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이런 자들에게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께서는 늘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며 돌보십니다. 따라서 참 성도는 세상 사람들 눈에는 비록 가련하고 불쌍하게 보일지라도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천국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3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예수님께서 자신이 말씀하신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을 이 계시가 마칠 때 한 번 더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2:7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복된 이유는 계시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혹은 계시를 주신 주님께서 속히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 배후에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승리가 있음을 알려주신 것, 그리고 그런 일이 가까운 시기 안에 실제로 일어날 것을 알려주신 것이 하나님의 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가난해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읽고 듣는 사람들, 특히 시련과 고난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모든 희망을 하나님께 두고 교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15)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6:15.

○기 도
    자비하신 주님, 주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저희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셔서 우리 주님을 믿으면서 저희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 때문에 오는 가난함이 있고, 주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여러 가지 압력과 고난, 박해가 있으나 천국이 우리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고 그리하여 저희의 인식을 환기시켜 주시옵나이다. 저희가 참으로 복된 것은 이 세상 것,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복된 것이옵나이다.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라도 주님을 신뢰하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얻고 참으로 복된 자인 것을 인식하며 당당히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상고할 문제
1.복음서의 중심 내용이 무엇이냐?
2.마태복음 1~5장까지 요지를 말하라.
3.팔복을 이해하기 위하여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
4.팔복의 중심 사상을 말하라.
5.예수님께서 팔복을 설교하실 때 어떤 화법으로 하셨는가?
6.성도의 복은 세상의 복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7.왜 우리 성도가 가진 복은 잃어버리지 않는가?
8.“심령이 가난한 자”란 문자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9.구약의 팔복은 무엇인가?(시편 몇 편?)
10.구약에 나타난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인가?
11.천국은 누구의 것인가?
* 교단 대한예수교 장로회
* 교회명 분당 하나로교회
* 담임목사 이상주
* 교회주소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120-2 성우빌딩(신한은행)5층
* 연락처 http://www.hanaroch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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