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임종,입관,발인, 하관) 어린이 장례, 추도에 대한 설교모음
본문
(살전 4 : 13-18) 165.168.289
임종은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엄숙하고도 가장 중요한 순간이므로 조금도 낙심할 필요가 없이 조용히 그리고 확신 가운데 서서 그것을 맞이해야 한다.
1, 가장 위대한 순간.
어떤 사람은 죽음에 대한 공포중에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어 낙심천만한 가운데 있고 또한 그 죽음을 모면하기 위하여 얼굴을 찡그리고 악을 쓰면서 고통스런 표정을 짓는 경우도 있다1 하지만. 믿는 우리는 복된 생애를 다 청산하고 천국에 간다는 확신으로 오히려 그것을 감사하면서 주님의 영접을 받는 가장 위대한 순간이다.
2. 새 생활의 출발.
믿는 자의 임종은 임종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는 위대한 삶의 새로운 전기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임증 때 부를 찬송과 기도로 언제나 연습하고 준비해 두어야 한다.
3. 마귀 권세를 물리치 때 .
내세에 대한 소망이 불투명해질 때 마귀의 유혹은 더욱 커진다. 하지만 예수님을 굳게 붙잡고 그를 의지하는 자들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여서도 오히려 초연해 지며, 마귀의 권세를물리치고, 숭리와기쁨과구속을 찬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천국71 대한 확실한 소망으로
마귀의 권세를 물리쳐야 한다.
죽음은 약속된 하나님 나라 입성이므로 엄숙하고 확신있게 맞이해야 한다.
사망율 이기는 능력
(고전 15 : 55-57) 152,222.289
인간에게 죽음이란 달갑지 않는 불청객이다. 이것은 우리의 공동체 안에 찾아와 마음을 한껏 흔들어 놓곤 한다. 그러면 이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1, 죽음의 본질 .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증오하는데. 그러면 이 죽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인류 최대의 원수이다. 하지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영광을 맛볼 수 있다. 때문에 믿는 자에게 이 죽음은 더 이상 원수일 수가 없다. 오히려 이것은 평안한 안식의 길로 인도하는 앞잡이가 될 뿐이다.
2 . 죽음을 이기는 힘 .
이것은, "우리 주 라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죽음을 맛보셨지만. 죽음이 그를 억류할 수 없자. 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 되셨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 땅에서 죽음이 와도 당황하거나 떨지않고 담담히 그것을 기다리며 환영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로버트 눈톤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나는 가노라, 저 영광의 세계로, 죄여, 이제는 안녕, 죽음이여,
이제는 안녕"이라고 외쳤다. 실로 죽음을 정복한 자만이 이 땅에서 가치있는 삶을 살았다고 할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성도의 부활이므로 사망을 이기는 것이다.
선한 목자되신 주님
(시23:3-6) 444,453,476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한 정황 가운데서도 언제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신다. 그는 항상 우리를 푸른 목장. 잔잔한 시냈가로 인도하신다.
1, 사망의 음침한 곯짜기에서 보호하신다.
이 성도는 한 평생을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왔다. 오늘까지 인도해 주신 그 하나님께서는 이제 사망의 음침한 골각기에서도 능히 인도해 주실 것이다. 여기 참석한 우리 모두도 잔잔한 물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강한 능력의 팔은 어떠한 원수 마귀외 권세도 물리칠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
2, 여호와의 집으로 인도하신다.
우리의 영원한 인도자가 되신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영혼을 소생시키실 뿐만 아니라 그를 하나님의 영원한 집으로 인도하신다. 그의 인도와 보호는 잠시 잠깐 동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스런 나라에 오를 때까지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3, 영원히 거하게 하신다.
이 땅에 사는 나그네는 잠시 잠깐 거하다가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만 한다. 돈이 많아 좋은 집을 소유했다 해도 그 집은 나의 영원한 소유가 될 수 없다. 쉽게 말해 그것은 임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집은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집이다.
하나님은 성도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고, 한 천국을 기업으로 주셨다.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임종-4)
(빌1:20-24) 231.471.474
바울은 네로의 죄수가 되어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해 그 모든 고퉁도 다 이기며 승리하였다.
1, 죽음은 현세의 모든 악을 제거해 준다.
세상에 얽매인 자들은 많은 갈등과 시련을 당하기 마련이다. 왜 그런가? 그들은 세상의 유행 따라 이리저리 방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땅 위에 있는 보화를 사랑하며 이것을 구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에 주어진 삶을 값있게 살다가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죽음도 오히려 유익한 것이 된다.
2, 죽음은 고통과 슬픔에서 해방시켜 준다.
이 땅 위에는 언제나 슬픔과 고통의 한숨 소리가 그칠날이 없다. 음산한 거문고의 소리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심란하게 한다. 그러나 죽음 저 너머 저쪽 나라에 가면 밤도 없고 어둠도 없고 죄도 없다.
3, 죽음은 그리스도의 존전으로 인도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는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여 영광스런 낙원을 선물로 받았던 것이다. 그를 믿는 성도는 현세에서 끊임없이 고통을 다 당하였지만 장차 낙원을 선물로 받는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오히려 찬송을 돌려야 한다.
하나님의자녀는 부름을 받아 갈곳이 천ㄱ국이므로 엄숙하고 조용하게 감사함으로 맞이해야 할 것이다.
두 종류의 집 (입관-1)
(고후 5 : 1-10) 272,541,545
신자는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장차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 받을 자이다. 그래서 이 땅 위의 집과 하나님 나라의 집 즉 두 집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1, 장막집 .
하나님의 말씀은 땅에 있는 우리의 집 곧 이 땅의 삶이 '장막집'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신다. 이 장막집은 야외에 다 치는 천막집을 가리킨다. 이것은 언제든지 이동하기 쉽게 만든 간이 집이다. 이것은 언제든지 거두기 쉽게 지은 집이므로 내구성이 전혀 없다. 우리가 학위에 소유하고 있는 집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이것은 역시 장막집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날 때 이것은 모두 없어지고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2, 영원한 집 .
이 땅 위의 장막집과 반대되는 집은 곧 영원한 집이다. 그것은 하늘 나라에 있는 것인데. 그것이 하늘로부터 우리에게로 와서 우리를 덧입게 하는 것이다. 고인은 한평생을 살면서 이 하늘 나라에 있는 집을 사모하고 열망했다. 그는 이제 그토록 사모하던 집을 가기 위해 이 장막집을 떠나려 하고 있다. 잠시 후면 그는 그곳을 가기 위해 조용히 관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을 지켜보는 우리는 슬퍼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진지하고도 엄숙하게 바라보며, 앞으로 그가 거주할 영원한 집이 있음을 확신하자.
성도는 약속된 천국의 집이 있으므로 사모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주 안에서 자는 자의 복 (입관-2)
(살전 4 : 13-18) 165,291,545
본문에 자는 자리는 표현이 세 번, 쓱은 자라는 표현이 한번 나오는데, 특히 주 안에서 잠자는 자의 누릴 복락에 대해 강조되고 있다.
1, 영원히 깨는 복
주 안에서 자는 자만이 영원히 깨는 복락에 참여할 수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부귀 영화에 심취해 있을지라도 주님을 모르면 영원히 어두움 가운데 헤메일 것이며 사망과 흑암이 지배하는 곳에 들어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주님 안에 있는 자는 살아서는 물론이고 죽어서도 영원허 깨는 복을 받게 될 것이다.
2, 부촬에 침메하는 복.
본문에서 예수 안에서 자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성도는 예수넘과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재림하실 때 모든 성도는 부활의 영광스런 몸을 입게 될 것이다.
3, 위로힘을 받게 되는 복.
오늘 본문의 말씀은. "소망 없는 다른 이아 같이 슬퍼하지 않게"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죽음 이후의 영광과 안위를 보기 때문에 멸망당할 자와 같이 더 이상 슬퍼할 필요가 없다. 오늘 고인의 영광을 마응 속에 그려보며 우리 또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음을 기억하자. 성도의 죽음은 영원히 사는 부딸의 복이므로 큰 위로와 소망을 갖게한다.
그리스도의 인의 죽음 (입관-3)
(롬 14 ; 7-9) 293.531,534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권면의 말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위하여 살아야 할 유일한 대상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라고 선포하였다.
1. 이웃을 섬기는 삶.
그리스도인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웃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서라면 거기에 따르는 회생이 어떠한 것이라도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감내해야만 한다. 성령에서는 사도들에게 역사하셔서 굻주린 백성들에게 기쁨의 소식을 전하게 하기위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여행을 하게 하셨다.
2, 그리스도를 섬기는 앎.
그리스도인외 목적은 그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사적인 생활에서 분만 아니라 공적인 생활에서도 밝히 표명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의 삶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하고 하나닙의 영광을 가리기도 한다.
3. 죽을을 예비한 삶.
신자의 삶은 죽음을 잘 예비하는 데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 고인된 OOO 성도는 죽음을 잘 예비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살았을 때 이웃을 위해. 주님을 위해 사는 삶으로 초지일관하였다. 이제 그는 펀안히 예비된 천국의 복락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성도의 죽음은 이웃과 주님을 섬기며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성도가 얻을 안식 (입관-4)
(시7 : 13-17) 222,225,476
성도가 이 땅 위의 삶을 살 때 믿음을 지키고 충성된 삶을 살므로쌔 받는 복락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 가지 이겠지만. 본문에서는 안식을 얻으리라고 하였다.
1,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신다.
하나님의 장막 속에 있는 성도는 펀안한 안식을 누릴 것이다. 이는 마치 뜨거운 사막을 여행하는 나그네가 시원한 오아시스를 만나 그 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과 같다. 성도는 현생에서 얼마나 많은 고난 가운대서 방황했던가!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안식의 장악을 두르심으로서 위로와 안식을 공급해 주신다. 여기에서 성도는 영원한 안7과 위로를 얻게 된다.
2, 그들의 목자장이 되신다.
주님은 자신을 믿는 성도들의 대 목자장이 되선서, 그들을 영원한 생명 강가로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공급하신다. 고윽ㅂㅂ하신다. 이 EKd 위에 있는 지도자는 한결같이 흠이 많고 불완전하지만 주님만은 의로우시고 완전하셔서 결단코 실패하지 않으신다. 그는 또한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시기에 고통ㅇ의눈물을 씻어 주시고 위로와 안위의 말씀을 들려주신다. 구분 안에 참 평화와 기쁨이 있다.
현생의 삶을 사는 성도는 언제나 찬바람이 휘몰아 치고 흔들리는 불안한 세상 가운데 처해 있다. 피러나 이러한 삶 속떼서도 고인은 믿음을 지키고 천국의 빛나는 소망을 바라보면서 충성, 헌신된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고인이 누릴 천국의 영광과 안위는 지극히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길이 살겠네 (발인-1)
고전 IS : 50-58 f 221,289.364
고인은 그동안 고통도 많았고 수고도 많았던 이 세상의 삶이었지만 주님께서 예비하신 그 복락의 나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것이다.
1, 발인식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환송의이다.
김활난 박사는 죽으면서 내 죽는 장례식은 환송의 의식이 되게 해 달라고 유언했다. 그는 세상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면서.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라고 믿음의 찬송을 불렀다. 여기에 참석한 모든 분들도 주님이 오라 부르실 때 이 찬송을 힘
있게 부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2, 발인식은 경건해야만 한다.
오늘 고인은 장지고 향하여 거기에 묻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의식은 거룩하고 경건해야 한다. 유족들은 혈육의 정으로는 섭섭한 마음 금할 수가 없겠지만 그 고인이 얻을 영윈한 생명의 면류관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위로를 받고 오히려 찬송을 불러야 할 것이
다. 왜냐하면 천국이 파속됐기 때문이다
3 . 발인식은 소망을 주어야 한다 .
발인식에 참여한 모든 조객은 고인의 발인을 보면서 우리가 사는 이땅의 생은 유한하여서 누구나 한번은 죽는 것이지만 그러나 죽음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세계가 있는 것을 깨닫고 소망을 가져야 한다. 육체의 죽음은 끝이 아니고 천국의 영원한 생의 시작이다.
우리가 장차 갈 그곳은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이다.
축복과 기쁨이 언제나 넘치는 그곳이다.
죽음 저 너머의 삶 (발인-2)
(욥 14 : 13-17) f 168,791,545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다시 살 수 있겠는가 ? 이러한 질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답변을 얻을 수 있다.
1 . 철학적인 논증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껏들을 준비해 놓고 계신다. 하나님은 죽음 이후의 생명을 사모하는 자들에게도 만족을 주기 위해 그것을 예비해 놓으셨다. 인간은 거의 대부분이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다. 문명인이든 야만인이든 그것이 모든 인류들 가운데 실제적으
로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
인간 이성과 자연의 빗이 내세에 대한 실제성을 증거해주고 있지만,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그것을 확실허 볼수 없고 다만 회미하게 볼 뿐이다. 이것은 주로 인간의 전적타락에 의해. 고 실체는 볼 수 없고 또 보려고 해도 다른 것으로 비취는데 근거한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겠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 11 : 25). 하나님께서는 영광과 존귀와 내세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그대로 갚아주실 것이다.
인간이 죽는 것을 볼 때 죄인이나 예수를 믿는자는 영생을 얻는다. 다만 영생의 질이 다를 뿐이다. 죄인은 영원한 지옥불에서 영벌을 받으면서 영생하는 것이요
의인은 하나님과 함께 영광의 세계에서 기쁨의 영생을 얻는 것이다.
여기가 아니라 저기에 (발인-3)
(신 12:9-10) f 232.292,541
우리는 안식을 기대하기 쉬우며, 잠시 후에 썩어 없어질 것에서 만족을 기대하기가 립다. 하지만 요단강 저펀, 천상에 영원한 가나찬이 있다.
1, 여기에는 진정한 만족이 없다
여기에 있는 인생들은 모든 면에서 제한을 받고 있다. 진토에 앉은 거지도, 백만장자도, 평민도, 주권자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피곤한 삶을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못마땅한 듯이 바라보며 보다 더 나은 것을 얻고자 분주하게 허등대고 있다. 그렇기 때문 에 이 땅에는 참 만족이 없다.
2, 이 땅은 멸망되어가고 있다.
전능자께서는 목적에 따라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목적이 끝났을 때 보다 새로운 목적을 위하여 새 창조를 하실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 지구는 불에 타 없어지고 하늘은 큰 소리를 내며 떠나갈 것이다. 이로 보아 우리의 영원한 안식은 분명히 여기가 될 수 없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
3, 하나님은 천국에 살도록 요구하신다
우리가 세상적인 즐거움에 도취되어 제멋대로 살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슬퍼하신다. 우리는 분명히 여기가 아니라 천국에 목적을 두고 살아야 한다. 그때 우리의 삶은 보다 고상해지고 거룩해지며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만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 고인은 여기가 아니라 저기로 가기 위해 출발을 하려 하고 있다. 우리들도 고인과 같이 천국으로 떳떳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
영원한 생명을 향한 열정 (발인-4)
(시91 : 16) f 220,221.543
불안한 현재와 불안한 미래에 사는 인생이지만. 이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고 그것을 향한 열정을 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엄다.
1, 유한한 인생.
세상일은. 공적인 일이든사적인 일이든, 모두시간의 제약을 받고 있다. 오늘 본문은 인간과 인간의 행하는 일들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음을 여러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썰명하고 있다. 이와같이 시간적인 존재인 인간이 그 한계를 극복해 보려고 발버등치며 애써 노력해 보지만 역시 인간은 나약하다.
2, 영원하신 하나님
하지만 히니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조금도 받지 않으신다. 그는 인간의 상상을 뛰어 넘어 영원 전부터 살아계신 분이시다. 그는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 분으로서 시간 세계에 오셔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
3,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불안한 인생을 사는 인간일지라도 하나님은 그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어 주셨다. 그런데 인간이 현생에 급급함으로 이것을 바라보지 못하여 더욱 불안한 삶을 살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계상황의 지배를 받고있는 인간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품고 있을 때, 영원하신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받게 된다.
죄를 깨달은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영생을 사모하도록 은혜를 주셨다.
흙 속에 잠들 무렵 (하관-1)
(고전 10 : 1-4) 188,226,291
하나님은 인간의 시조 아담을 만드실 때 흙으로 빛어 만드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일생동안을 흙과 더붙어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다시 흙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
1, 슬픔의 시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모든 인간은 때가 되면 흙으로 되돌아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적인 존재인 것이다. 때문에 믿음의 눈으로 이를 지켜보는 자들은 슬퍼만 할 것이 아니라 보다 새로운 세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다.
2, 부활을 기약함.
주를 믿는 신자으 죽음이 복된 이유는 부활의 새 아침을 기약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의'죽는다'는 표현은 '잠잔다'라는 표현으로 바꾸어야 온당하다. 불신자들은 육체의 죽음으로 영원한 죽음을 당하고야 말지만, 신자는 육신의 죽음으로 그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오히려 새로운 삶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3, 영원한 생명세계로의 전이
신자의 죽음은 삶의 종지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로 들어가는 첫 단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생명을 청산할 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간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 갑니다"라고 찬송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천국은 이땅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슬픈 일이지만 다시 부활하여 영원한 천국에 가는 것을 감사하자.
축복된 죽음 (하관-3)
(계14:13) f 233.289.474
고인은 세상의 온갖 모진 풍파와 환난을 당하면서도 맡은 바 소임을 감당하기 위해 충성된 삶을 실아왔다.
1, 모든 수고플 그쳤다
인간은 이 땅에 올 때 수고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그런데 죄를 짓고난 이후 인간의 수고에는 고통이 뒤따랐고 땀을 흘려야 했다. 그러나 성도가 죽은 후에 가는 천국은 언제나 기쁨과 찬송이 있는 곳이다. 성도는 그곳에서 모든 수고를 다 바치고 주님의 위로를 받을 때지나간 고통을 꿈에 본듯 다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2, 안식을 한다.
이 땅에 안식이란 있을 수 없다. 돈이 많아 세상을 즐기며 산다 해도 마음의 초조와 불안과 고통은 그칠 날이 얼다. 하지만 성도가 그곳에서 얻게될 안식은 가장 완전한 안식이며, 영원한 안식이다. 때문에 성도의 현실의 삶은 영원한 안식의 처소를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의 삶에 지나지 않는다.
3, 축복된 삶을 산다.
성도의 죽음이 귀한 것은 이 죽음의 현장에 많은 화환이 둘러쌓여 있기 때문이 아니요 조객이 많이 모여 들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성도가 믿음을 갖고 삶을 살았기 때문이며 주 안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죽음이야말로 저주가 아닌 복된 죽음이며 피 이후 천국에서 새로운 축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성도의 죽음은 모든 수고를 다마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 감으로 축복인 것이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하관-4)
(약 4 : 13-17) 294,531,532
인간은 변화무쌍한 세상 삶을 살면서 여러 가지 시련과 고통으토 인해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또 어떤 때는 인생이 무엇인가라고 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1, 안개와 같은 인생.
안개는 잠깐 있다가 아침 해가 돋을 때 사라지는 순간적인 것이다. 우리 인생이 바로 이와 같다. 천년만년 살고 지는 것 같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늙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가 우리 인간인 것이다. 안개와 같은 우리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할 때 보람있고 가치있는 삶을 살게 된다.
2, 인생의 목적
인생이 안개와 같다 할지라도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을때 그 인생은 야름다운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목적의식을 정립할 수 있는가?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인간이 이같은 거룩한 목적에 따라 자신의 의무를 수행할 때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는 것이다.
3, 인생의 의무
안개와 같은 인생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해진 영혼은 이 땅에서 거룩한 의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므로 이웃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섬기며 봉사하는 일을 해야 한다. 오늘 우리는 고 OOO 성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과하여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는 성도가 되자.
안개와 같은 인생이지만 예수를 영접한 자는 영원한 삶을 약속받았으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는 것이다
영생에 대한 열정 (하관-4)
(고후 5 : 4-7) 225,540,544
모든 인생들은 태어나서 각각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길을 미리 알 수가 없으며, 두려움이 깔린 산골짜기의 길을 추측할 수가 없다.
1, 하나의 길.
이 세상에서 인생이 걸어가는 길은 각자가 상이하지만 마침내는 모두가 하나의 길에 귀착된다. 빈부귀천 동서고금 장유노소 모두가 이 한 길로 내려가고 있는 것다. 이 길은 바로 오늘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바와 이 죽음이라는 길이다. 이 길은 어느 누구도 거부할 없고, 두려워하지 않을 순도 없다.
2, 영생의 길 .
인생이 거부 할수 없는 죽음이라 해도, 죽음 이후의 영생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사모할 때, 죽음이 그의 원수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영생의 길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이 길은 간절히 믿음으로 사모하는 자에게 주
어진다.
3,사모하는 자의 열정
미지의 인생길을 걸어가지만 나그네의 삶을 사는 자들이 지만 영생을 사모하고 그것을 위한 삶을 사는 자들은 그 생애가 아름답고 귀하다. 그는 이 땅에서 부귀영화에 초점을 두지 않고 영생에 초점을 두고 살기 때문에. 다소 손해가 있을지라도 이를 즐겁게 감내하여 찬양 부르며 전진해 나간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예수를 믿으므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죽음의 근원
『삼상 20 : 1-3] f 289,290.292
모든 인생들은 나민은 이 땅 위에 천년 만년 살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죽음의 그림자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들 위에 임한다.
1, 죽음의 때 .
인간의 죽음의 때는 참으로 예측하기 어렵다. 오늘 건강하게 집을 나갔던 자가 저녁에는 시체가 되어 병원영안실로 직행하는 예가 우리 주위에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옛날 다욋이 체험했던 한 예이기도 하다. 그는 위기일발의 순간순간을 살면서 항상 죽음을 직감하였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 인생의 생애이다.
2. 죽음의 정의 .
인간은 죽음을 육체적인 생명의 종지로만 생각하지만 성경은 세 가지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다. 즉 겉육체적인 죽음, 건영흔이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는 죽음, 길 구원받지 못한 자의 생애. 이로 보건데 인간의 죽음은 그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멸절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 로의 삶의 변이를 뜻한다.
3,. 죽음이 나에게 의미하는 것.
죽음은 빈부귀천 동서고금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인생들에게 임하는 가장 공굉한 손넘이기도 하다. 이 엄연한 사실을 목전에 두고 있는 인간은 죽음을 잘 예비하여야 한다. 실아 생전에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그 분 뜻대로 행하므로 복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죽음의 때를 예측할 수 없으므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준비하는 자들이 되자.
바울의 인생관 (입관-1)
딤후 4 : 6-8 231,402,544
우리 인생은 이 땅에 잠시 잠깐의 생애를 살다가 가야만 하는 존재이다. 언겐가는 모두다 이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데 바울의 생애를 통해 교훈을 얻고자 한다.
1, 과거의 생애 .
바울은 인생을 투쟁하는 전쟁터로 보았다. 그는 을바른 인생. 후회없는 생애를 살기 위해서는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고 했다. 싸움이란 적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우리는 싸움의 대상은 누구인가? 그것은 이생의 정욕. 육신의 정욕.세상의 자랑이다. 이것들은 우리의한펑생을 괴롭게 하다가 죽음과 동시에 사라진다.
2, 현재의 생애
바울은 지상 사역을 부7런씻 다 필하였다고,갈 준비를 온전히 갖추었노라고 확신했다. 이와같이 고백자 확신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나도 과연 숨을거둘 때 이와같은 아름다운 확신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부에 처할 줄로 알고 가난 속에서 자족할줄 알며 오직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해 살았던 바울이다.
3, 미래의 생애 .
바울은 죽음을 예상하고서,"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딘로'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미래에 받을 상급을 사모함으로 죽음에서도 오히려 위안과 용기를 받았던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바라보며 즐거움으로 사명을 감당한 것이다.
바울은 진리를 위해 싸왔으며 복음을 위해 생애를 다바쳤다. 그리고 본받을 만한 삶을 살았다.
죽음을 위한 준비 (임종-2)
사 38 : 1-3 f 294,295,296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두지 않고 공평하게 임한다. 그리고 이 죽음은 어김얼이 숨김없이 조금도 오차 없이 사람의 생명을 잇아간다. 이 죽음으로 인하여 사람은 그가 생전에 행했던 그대로 심판을 받는다.
1, 우리는 죽은 자의 영흔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
장례예식의 목적은 죽은 자의 상태를 진척시키기 위해 집행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 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영흔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살아 있을 때만 가능하다. 성경에는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이 어느 곳에도 엄다. 우리는 친지들이나 이웃들이 살아있을 때 그들의 영흔을 위해 기도하고 권면해야 하지 그들이 이미 죽은 이후에 기도 한다는 것은 아무런 효능이 없다.
2, 유족들에 대한 권면의 말씀.
장례식의 중요한 목적은 남아있는 유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그 말씀 위에 굳게 서게하기 위함에 있다. 비록 장례식이 우리 영혼의 상태와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지 못하지만 우리가 존경하는 자의 죽은 시신을 짐숭과 같이 아무렇게나 매장할 수는 없다. 장메식 의 또 하나의 목적은 죽음에 대한 교훈을 심어주기 위합에 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엄연한 진리를 망각하기 립다. 시간과 감각에 속한 것들에 열중하는 동안 세상 재리에 빼앗겼던 마음을 영원한 것들로 되돌아 오게 함은 중요한 일이다.
인간들의 행진 (입관-1)
욥 30 : 23 225.467,532
욥은 극한적인 고통과 시련을 당하고 있었다. 그에게 사랑하는 자녀들과 아내가 떠나갔다. 소유도 모두 떠나 갔고 종들도 떠나갔다. 절친한 친구들은 그를 위선자 사기꾼으로 몰아 붙였다.
1,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다.
우리가 죽어 무덤에 묻히는 것은 우연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확실한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 생명의 위대한 조성자께서 그렇게 되도록 정하셨기 때문이다. (히9 : 27) 그러므로 인간이 죽어 묻히는 무덤이야 말로 인간 본연의 처소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가장 공평한 장소인 것이다.
2, 죽음은 심각한 것을 깨닫게 힌다.
인간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보고서 자신의 올바른 인생관을 정립하는 기회로 삼는다. · 우리는 시간을 영원처림 생각하거나 영원을 시간처럼 생각하는 착각을 하고 있다가 죽음을 목격하고서 이를 시정하곤 한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이야 말로 우리의 위대한 스숭이요 길잡이라고 할 수 있다.
3, 죽음은 영원한 생명을 붙잡도록 고무시킨다.
임박한 죽음을 의식하는 자는 영생을 사모하기 마련이다. 그런 자에게 매 순간 순간은 가치있고 보람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죽을때 영혼을 생각하게 하고 영생을 사모하게 하신다. 영생을 얻는 길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 얻을 수 있고 영광을 누릴 수 있다.
죽음은 인생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므로 영생을 사모하여 예수님을 영접해야 할 것이다.
영원히 멸한 사망 (발인-1)
(사 25 : 8) 290.532,544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죽음위에 생명으로 충만케 하시는 분이시다. 오늘 본문은 인간 최대의 원수인 사망을 이기시고 숭리하신 그분을 바라보게 한다.
1,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은 승리 .
산헤드린 공회는 로마와 결탁하여 그리스도를 죽이고 무덤 속에 넣은 후 군병들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사망의 권세가 아무리 막강하다 해도 그리스도를 더 이상 그 착고에 매어 놓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사망을 이기겼을 뿐만 아니라. 그를 믿는 모든 인생들에게까지 사망에서 부활을 맛보게 하셨다.
2, 사람의 공포를 물리친 승리 .
사망에 대한 인간의 공포는 그의 영과 혼과 감정에까지 스며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은 장차 부활의 영광에 참예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공포의 도가니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망을 향해 담대히,"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3, 면류관으로 말미암은 승리 .
믿는 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할 때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누림으로 그 숭리를 온전하게 확증시킬 수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숭리로 사탄을 멸했기 때문이다. 성도는 이땅위에 살고 있지만 이미 승리한 자로서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 아래서 믿음으로 길를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촬로 사망을 멸하고 영원한 승리를 얻었으딜로 사망을 두려워 말자.
인생에 대한 평가 (발인-2)
(시 90 : 9-10) 289.297.536
인생은 원래가 가치있는 존재이며 가치있는 사역을 하다가 전능자를 만나 뵈어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어야 할 자이다.
1, 인간 연수에 의한 평가
오늘 본문은 인생이 살았던 연수게 대해 언급하고 있다 지상에 태어났던 대부분의 인간들은 70, 80의 생애를 살다가 죽어야만 한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유년시절과 어린이 시절을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하지만 연수의 길고 짧7이 큰 의미를 주지 못한다. 다만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에 있다.
2, 행위에 의한 평가
인간의 생명은 연수에 의해 평가되기 보다 그 행위에 의해 평가된다고 봄이 더 합당하다. 현대 문명의 이기는 이전에 여러 해 걸리던 것을 짧은 시간에 깨끗이 해결 지어 준다. 그러므로 인간은 주어진 순간 순간을 어떻게 살았느냐가 보다 중요하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목표로 그 영광을 기대하떠 살아야 한다.
3, 내세 준비에 의한 귐가.
현재의 생애를 잘 사는 방법은 내세의 생애를 잘 준비하는데 있다고 봄이 옮다. 그러므로 인생은 초기부터 진정한 기반을 잘 선택하여 합당한 재료로써 맹렬한 불에도 견딜만한 집을 지어야만 할 것이다. 성도의 진정한 준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승리 (하관-1)
(고전 15 : 57-58) f 384,396,397
사망의 세력이 아무리 무섭다 해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궁극적으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망을 이기는 부활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1, 죽음에서의 승리 .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죽음에 대해 숭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죽음의 위협 앞에 수 없이 처해 있었지만 그 때마다 부촬의 신앙으로 인해 담대히 일어설 수가 있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도 이와 동일한 확신을 가지고 죽음의 현장에서도 부활의 영광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어야 한다
2,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승리
현 세상에서는 부귀 영화의 척도에 따라 인간을 판단한다. 그러나 그러한 조건이 장차 우리가 얻을 부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를 누릴 자들은 그러한 승리로 말미암아 감사한다고 고백하고 입으로 시인하는 자들이다. 승리하신 아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곧 나의 생명이므로 영원한 승리를 얻은 것이다.
3, 승리 연율 자들의 자세 .
우리는 멸망 당할 자들과 같지 아니하기 때문에 세상의 변화무쌍한 풍조에 쉽사리 혼들리거나 놀라지 않는다. 우리는 소심하고 두려워 안절부절 못하는 자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새로.운 부활세계를 바라봄으로 힘과 용기를 공급받아야 하겠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를 확신하는 자들은 영생을 소유한 하나텀의 백성들이다.
그리스도인의 잠 (하관-2)
(시127 : 2) f 418,464.474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믿는 성도들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성도의 모든 샘애 가운데 구체적으로 역사를 하고 있다.
1, 하나님외 사랑하시는 자들.
하나님은 죄악의 쇠사슬에 묶여있던 자들을 당신의 피값으로 구속하시고 자녀로 삼으셨다. 자녀이면 그좌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충의 대상이될 수 있다. 그들은 장차 하늘의 신령한 유업에 참여자가 된다. 그들은 이것을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과 위에 있는 것들을 위하여 살고 있다.
2,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
여호와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신령한 은사들은 물론 육적인 필요도 채워주신다. 그는 그들에게 잠. 안식 만족을 주신다. 그가 공급하시는 만족은 모든 선한 것에 충만히 역사하고. 또 창세 전에 택하시고 구속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
3, 사랑하는 자들에게 잠을 주심 .
현세의 생애를 잘 사는 방법은 내세의 생애를 잘 준비하는데 있다고 봄이 옳다. 그러므로 인생은 초기부터 진정한 기반을 잘 선택하여 합당한 재료로써 맹렬한 불에도 견딜만한 집을 지어야만 할 것이. 성도의 진정한 준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나외 죄를위해 죽으셨음을 믿어야 할 것이다.
인생은 잠깐이므로 자랑할 것 없는 약한 존재로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천국시민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어린이 (어린이 임종-1)
마 19 : 13-15 273.299,300
오늘 사랑하는 어린이를 잃고 슬퍼하는 이 가정에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주시는 말씀은 어린이를 귀중히 보신다는 말7이다.
1, 어린 아이를 사랑하심
사람들은 어린이를 무시 흑은 간과하는 예가 허다하였다. 우리 나라 관슘에 의할 것 같으면 27세가 넘어야만 비로소 썽인'(7A), 즉 인간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예수님의 입장과 너무도 상이하다. 아수님은 제자들이 어린이를 무시하였을 때 이를 진노하셨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가 바로 이런 자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2, 어린이를 구속하심 .
어린이도 어른과 마찬가지로 그의 보혈의 공로를 필요로 한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에게도 전가되어 있는 원죄의 죄책을 말끔히 썬기셨으며. 하늘나라의 영원한 저택에 그들의 영흔을 안식시키신 것이다. 어린 아이도 완전한 자, 인격체로서 천국의 기업을 받아누릴 자격이있는 것이다.
3, 하늘 나라를 물려주심
어린이들도 불멸의 영흔을 지닌 무한히 가치있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이따금섹. "애들이 뭘 안다고 그래"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그들의 키와 지혜가 조금 부족할지라도 그들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며 하늘 나라를 기업으로 물려 받을 짜들이다. 진실로 어린 아이좌 같은 마음을 품지 않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은 어린이에게로 영생을 허락하시고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가 이런 자와 같다고 하셨다.
어린이의 죽음 (입관-어린이)
(창 37 : 27-34) ? 233.298.535
요셉을 미워하던 그의 형제들은 요셉을 제거하기로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사악한 심성을 돌이켜 요셉에게 복이 되게 하셨다.
1, 어린 아이가 살찌던 목적 .
그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살았다. 진실로 때묻지 않고 숭리의 삶을 살은 어린이는 하니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둘러앉은 모든 사람들은 이 어린 아이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법을 배워야 하겠다. 그는 예수 안에 속한 삶을 살은 것이다.
2, 어린 아이가 옮건진 목적
우리가 세상적인 차원에서만 바라 볼 때에는 "아이가 없구나"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아이는 유족들의 가슴 속에. 그리고 하나님의 존전에 살아 있다. 그는 지금 하늘 나라에서 무한한 축복들을 누리고 있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그 곳, 눈물이 더 이상
없는 맑고 밝은 그곳에서 영원히 여호와를 찬송하며 축복된 삶을 향유하고 있다.
3, 어린 아이가 팔려간 결과
요셉이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려간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스라엘이 400년간 애굽에 종살이 할것을 예언한 것이 실현되는 것을 볼수 있다(창15:12-15). 그릭 요셉이 총리가 되고 큰 민족을 이루어 탈출하게 된다. 따라서 이 죽음은 슬픈일이지만 천국을 소유함을 생각할패 위로가 된다.
이는 곧 우리의 현실의 생애는 고난이 많고 슬프지만 미래는 영광스런 천국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결과를 낳고야 만다는 것이다.
돌아오지 못할 강 (발인-어린이)
(삼하 12 : 20-23) f 226,224.541
오늘 본문에 보면 한 아이가 돌아오지 않는 머나 먼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하늘나라에 펀안히 안식하기 위해 마지막 여행을 떠난 것이다.
1, 죽음의 공정성
죽음은 그 어느 것에도 차별을 두지 않는다. 가장 비천한 사람들의 집은 물론 가장 귀한 신분외 집에도 동일하게 찾아간다. 어린 아이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이 죽음의 강을 건너야 한다. 우리는 이와같은 슬픈 현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있으므로 오히려 새로운 생명의 소망 가운데 거할 수 있다.
2, 돌아오지 못할 감.
다욋 왕은 왕의 어린 아이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갔다고 슬퍼하였다 그렇다 죽음은 왕의 저택이라고 못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다욋 왕도 때가 되면 조만간 죽음을 맞이해야만 한다. 그도 역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강을 건너기전에 심각하게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내가 강을 건넌다면 영생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나를 점검해야 하겠다.
3. 다시 만남의 해후
남아 있는 유족들은 장차 하늘 나라에 가서 꿈에도 잊지못할 이 어린이를 다시 만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믿음과 회개로써 모든 죄를 깨끗이 용서 받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피 공로를 믿음으로서 가능하다. 죽음을 누구든지 찾아 가나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두려워 말고 감사하며 엄숙히 맞이해야 할 것이다.
수넴여인의 아이 (하관-어린이)
(왕하 4 : 26-31) f 168.291.545
수넴 여인의 이야기는 성경상에서 가장 애처로운 사건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어린 아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슬픔 가운데 처해있는 모든 부모들을 위로하는 이야기이다. 오늘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거룩한 위로와 용기와 확신을 공급받게 된다.
1. 어린이는 하나님의 선물임 .
이 아이는 가정에 무한한 기쁨을 주기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만일 어린이가 없는 사회나 가정을 생각해 본다면, 그 적막함과 쓸쓸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의롭고 고달픈 현실의 삶 가운데서도 어린이를 바라봄으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무한한 은혜에 대해 깨닫게 될 것이다.
2, 어린이의 갑작스런 소환.
하나님은 어찌하여 수넴 여인에게 아이를 뺏앗아 가심으로 그녀를 절망시컸는가? 하지만 여기에는 하니님의 놀라운 사랑과 섭리가 내재되어 있다. 세계요한과 우리 주님의 경우가 바로 그 것이다.
3, 어린 아이가 일으킴을 받음
하나님은 수넴 여인의 가정에 아이를 다시 돌려주심으로러 기쁨과 행복을 만끽하게 하셨다. 이 아이가 다시살아난 것은 장차 부활의 영광에 참예함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이 가정의 아이도 다시 들어 을리실 것을 믿음으로 오히려 신앙 가운데 굳게 서야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간이 다 알 수 없으나 성도의죽음 후에는 반드시 부활이 있다.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요 14 : 18) f145.293,294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슬픔에 휩싸여 있던 제자들에게, "내가 너회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1 . 그는 우리를 위하여 먼저 고난을 받으셨다
그가 고난받으신 것은 우리를 위한 대속적인 고난이다. 그가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는 모든 죄의 착고에서 해방되었으며 참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비록 현실의 고난이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할 때에도 있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근본적으로 자유를 주셨음을 기억할 때, 이 모든 사실이 그렇게 심각하게 문제시 되지 않는다.
2 . 그는 위로자 곧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오늘 슬픔을 당한 이 가정에 찾아 오셔서 위로의 말씀을 하심으로 앞으로 전개될 모든 일들에 용기와 확신을 심어주신다. 성령님은 이 가정을 지키시며 보호하시며 인도 하신다. 언제나 떠나지 않으시고 머물러 계시며 모든 것을 살펴 보시며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
3 . 그는 다시 만남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케 하신다.
우리는 오늘 극심한 환난 가운데 헤메이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위로자가 되시고 환난 가운데서도 장차 받을 영광의 상급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모든 위로와 소망의 근원이신 그분을 바라봄으로 앞을 향해 전진해 나가자.그때에 우리에게 영광의 상급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고난을 받으셨고, 성령을 보내사함께하게 하시고. 영원한 소망을 주신다.
위로의 하나님
(고후 1 : 3-4) ? 170,171.489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특히 슬픔 가운데 빠져 방황하는 가정에 찾아와 위로의 말씀을 주심으로 용기를 얻게 하시는 분이시다.
1, 자비의 하나님
하나님은 공의로 판단하시는 거룩한 분이시지만 그와 동시에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세파에 시달려 슬퍼하고 낙심하는 이들에게 깊은 사랑으로 어루만지시고 쓰다듬으로 오시는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진실로 그는 환난 중에 위로자가 되시고, 낙심천만한 가운데 새로운 용기와 확신을 주시는 분이시다.
2, 환난 중에 위로해 주시는 분.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 당할 때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우리 가까이에 오셔서 우리의 위로자가 되신다. 그는 세파에 찐기고 상처받은 영혼들을 따스한 사랑의 품안에 고이 품어주심으로 무한한 위로를 받게 하신다. 환난과 시련이 많은 우리들을 위로하심으로 승잔 띤 나갈 수 있게 하신다.
3, 남을 위로하게 하시는 분.
하나님의 위로는 위로받는 나 자신에게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고통 당해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방황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하게 한다. 이같이 하나님의 위로는 풍성한 것이어서 남을 위로함으로 자신이 더욱 위로받고 고통 가운데서 놓여남을 받게 한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환난 중에 위로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고난을 정복하신 하나님
(요 16 : 33) 363.464,475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잠시도 안정되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다. 세상이 흔들릴 때 그 가운데 사는 자들, 특별히 성도들은 괴로움과 고통을 당한다.
1, 환난 많은 세상.
이 세상에는 예측못할 환난들이 많이 있다. 생각지 못한 환난들이 우리에게 휘몰아칠 때, 우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냥 주저앉는 경우를 맞이한다. 그러나 주닝께서는, "너회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대로우리는 담대해야 한다.
2, 환난을 이기는 비결
어떤 가정에 예기치 못한 큰 환난이 휘몰아쳐 오면 환난 당한 장본인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어리벙벙해 말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우리는 현실만을 바라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환난을 극복해야 하겠다.
3, 환난을 극복하신 주님.
성도가 환난을 당왜도 낙심하지 말 것은, 예수님이 먼저 고난 당하시고 그 고난을 이기시고 성도들에게 힘과 소망을 주시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환난풍파도 성도들에게서 기됨을 빼앗아갈 수 없다. 그들은 고난 당하시고 그갓을 정복하신 주님을 의지함으로 그들 또한 고난을 정복하는 이들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모든 고난을 정복했으므로 두려워 말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위대한 해후
(암 4 : 12-13) f 224,227,231
고 000 성도는 하나님을 만남으로 위대한 해후를 하셨고. 우리 또한 멀지 않은 장래에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하는 성도를 만나게 될 것이다.
1, 만나기 위해선 준비가 필요하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하나님을 만나기에 적합하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다. 죄를 물 마시듯 마심으로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그들에게 임하고 있음을 그들은깨딜아야 할 필요가 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예비하지 않았던 자들의 결과는 어떤 것인가? 이 세상예서 사람의 인정만 받고 주님의 인정을 등한시하며 살았던 자들에게 주님은. "나는 결단코 너회를 모른다"고 부인하실 것이다. 우리가 친구를 방문할 때에도 예비를 하고 찾아가거든 하물며 만군의 하나님, 꿈에도 사모하던 그분을 만나뵙기 위해 찾아가는데도 예비를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2, 위대한 해후를 위해 준비해야 할 방법은 ?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첫 째로,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욥 33: 27;시 38: 18;렘 3: 21). 회개하지 않은 죄악된 모습으로는 주님을 모실 수 없다.
둘째로,그리스도의 회생에 전적으로 의지함으로 죄지은 그대로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엡 2: 13-18;히 9: 15).
세째로.새로운 생명의 삶 가운데로 걸어가야 한다. 새생명은 주의 보혈로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예비하는 삶. 즉 거룩하고 외로운 삶을 산 사람이 기쁨의 해후를 이를 수 있다.
깨어 있는 생활 (추도)
(눅 12 : 36-40) f 212,370,379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충성된 삶을 살았는가를 점검해 봄으로서 바른 길을 걸어가는 전기가 되어야 하겠다.
1, 주인과 종.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주인이 되시며. 우리에게 맡기신 소임에 충성, 봉사, 헌신하기를 요구하신다. 우리에게 소임을 맡기시고 하늘 위에서 그 일을 얼마나 잘 감당하고 있는가를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고 계신다. 우리는 그의 종된 자들로서 그의 일을 성심껏 잘 감당함으로 그것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아야 하겠다.
2, 주님의 오시는 때 .
주님이 오시는 때는 언제 어느 시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때는 밤 이경일런지 삼경일런지 아무도 모른다.그 러므로 우리가 주의해야 할 태도는 특정한 때만이 아니라 항상 깨어 있는 자세로 충성 봉사해야만 한다.
3,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 .
주님은 하늘 나라에서 우리가 늘 깨어있는 생활을 하고있는가를 지켜보고 계신다. 늘 깨어 있다는 것은 의롭고 경건한 생활, 날마다 날마다 그분의 형상을 덧입기위하여 수고하고 애쓰는 삶의 연속을 의미한다. 주님을 닳는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부단히 노력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바로이것이 오늘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깨어있는 삶이란 하나님의 통치를 잘 받는 생활이므로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대장부가 되라 (추도 2)
(왕상 2 : 1-4) f 375,397,471
다욋은 늙어 죽게 되었을 때 아들 솔로몬에게 가장중요한 말을 유언으로 남겨 주었다. 이 유언은 가장 귀한 말로서 깊이 새겨들어야 할 교훈적인 것이다.
1, 대장부의 삶
다욋은 그의 아들이 대장부가 되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그 아들은 장차 자신의 뒤를 이어 국가의 총책임자가 되어 나라를 다스려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대장부가 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지 못할 때 세상의 흔탁한 급류에 휘말려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2. 대장부가 됨으로 인한 7축복.
현 세상은 우리가 졸장부가 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나약한 소인배가 됨으로 약속의 땅을 얻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말세지말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하나님 말씀 편에 굳게 서서 담대하게 전진해 나아가야할 필요가 있다. 그핑게 될 때만이 하나님은 형통의 길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3, 형통한 삶.
대장부가 됨으로 누리는 축복은 그의 길이 형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원수 마귀가 들끊는 세상 가운데서도 신앙의 대장부가 나가는 그곳에는 모든 대적들이 다 물러갈 수 맊에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 사건으로 사단을 결박했기 때문이다.
다욋은 믿음으로 승리한 삶이 하나님의 백성이 누려야할 삶이요, 가장 큰 축복이라고 유언하고 있다.
우리의 본향은 (추도)
히11:13-16 f 224,230,541
인간은 이 땅 위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피 있다. 하지만 나그네라도 앞으로 돌아갈 본항이 있을 때 고 나그네는 미미 나그네가 아닌 것이다.
1 . 나그네 인생 .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의 삶을 실아왔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아무 미련없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하나님께로 갔다. 우리 역시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다. 우리도 신앙의 선진들과 같이 예비하는 삶을 살다가 주님께서 부르실 때 거리낌없이 갈 수 있어야 겠다.
2, 본향을 사모하는 이 .
믿음의 선진들은 자신들의 돌아갈 고창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더 나은 본향을 향괘 나아갔다. 성도들의 본향은 어디인가? 그곳은 하나님께서 우리를위하여 예비하시고 축복하시고 약속하신 신령한 가나안인 하나님 나라이다. 그곳은 이 땅에서 간절히 사모하는 이에게 주어진다.
3, 하나님께서 예비히신 그곳
믿음의 조상들은 바로 이 성을 사모했기 때문에 비록 그들 앞에 고난이라는 현실이 가로놓여 있을지라도 그것을 과감히 감내하고 전진해 나갔던 것이다. 우리가 사모하는 그곳은 하늘 나라이다. 그곳은 눈물, 사망. 고통이 없는 사랑과 회락과 화평이 언제나 넘치는 곳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약속된 천국이 있으므로 그곳을 사모하여 충실된 삶을 살아야 한다.
영원히 밤이 없는 곳
(계22:5) f 227.777,273
우리는 밤이 되면 어떤 일을 하고 싶어도 아무일도하지 못하고 쉬어야 한다. 우리가 앞으로 갈 그곳은 영원히 밤이 없는 곳이다.
1 . 밤은 무지의 상징이다.
현대 과학이 급속도록 발달하고 지식이 고도치 수준에와 있지만 여전허 어둠의 베일 속에 가리워 있다. 왜냐하면 현세상은 어둠에 가리워져 있는 어둠의 세상이기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때가 되면 현세의 고통스럽고 제한된 틀을 털어버리고 얼굴과 언굴을 맛대어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 밤온 죄악의 상징이다.
모든 죄악의 역사는 밤에 이루어졌다. 인간의 심성도 밤이 되면 죄악에 유혹 받아 거기에 동참하기가 쉽다. 하지만 우리는 빛에 속한 자들로서 이 어두움의 장막을 훌훌 걷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겠다. 빛의 갑옷은 그리스도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소망하며 그를 믿는 것을 말한다.
3,밤이 없는 그곳.
천국에는 주님이 친히 빛이 되시기에 햇빛과 달빛. 별빛이 더 이상 필요가 없다. 우리와 유명을 달리하고 000 성도는 지금도 그곳에서 거하고 있다. 우리는 그곳을 사모하며 이곳을 위해 예비하는 자세로 오늘을 살아가야겠다.
천국은 의와 평강과 히락이므로 밤이 없고 영원한 기쁨이 있는 곳이다. 그러으로 성도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기쁨으로 이 고난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