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어떻게 하면 보다 명료하게 전달할까?
본문
설교자도 메시지를 명료하게 전하고자 할 때 몇 가지 극복해야 할 과제가 있다. 첫째, 설교에서 설교자들이 성경의 본문 이곳저곳으로 배회하는 경향이 많다. 자신이 말하는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온갖 본문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저것 너무 많은 내용을 말하려다 결과적으로 청중에게 전해지는 것이 너무나 적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출발할 때는 한 마리 곰을 쫓아간다. 그러나 이내 몇 마리 산토끼들에게 마음이 끌리고 몇 분이 지나지 않아 그것들을 잡으려고 그것들만을 계속 쫓아간다. 결국 처음에 목표로 삼았던 곰을 놓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은 게 곧 많은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말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의 과제도 잘 다뤄야 한다. 구두 언어는 문자 언어에서 활용할 수 있는 몇 가지 보조 기구들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명료한 의미 전달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글로 의견을 전달하려고 할 때 우리는 단락 구분, 구두점, 인용 부호 등을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설교할 때는 이런 것들을 사용할 수 없다. 게다가 음성을 들음으로써 의미를 붙잡게 되는 설교의 경우에 그것이 진행되는 동안 어느 한 대목을 듣는 자가 이해하지 못하고 놓치게 된다면 뒤돌아가서 이를 다시 되새겨 볼 수 없다. 만일 되새겨보려 한다면, 지금 설교자가 말하는 내용까지 놓치게 된다. 따라서 설교자는 청중이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줘야 할 책임이 있다.
설교문 작성이 도움을 줄까
어떤 설교자들은 설교를 명료하게 전하기 위해 설교문을 낱낱이 작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종종 정반대 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설교 노트의 명료성과 전달의 명료성, 양자 간의 간격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우선 주제부터 명료해야 한다. 설교문을 작성할 때 두 가지 문제에 언제나 답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는 ‘내가 지금 무엇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가’라는 문제다. 설교의 주제 즉 설교에서 말하려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간결하고 명확한 용어로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진술들이다. 우리가 왜 헌신해야 하는가? 또는 어디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가장 효과적으로 섬길 수 있는가? 우리는 이것을 주제라고 부른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내가 지금 무엇에 관해 말하려고 하는가’에 대한 답변이다. 또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 속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 것인가?’ ‘그 주제에 관해 구체적으로 진술해야 할 주장들은 무엇인가?’ 우리가 종종 실패하는 것은 강단에 올라서기 전에 이 두 가지를 못 박아 놓지 않기 때문이다.
강해 설교자라면 또 하나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설교의 목표가 무엇인가? 주제 설교자는 출발에서부터 설교 목표 설정에 이점을 안고 있다. 종종 그 목표가 주제 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강해 설교자는 지금 자신이 이 설교를 왜 하고 있는가에 대한 명확한 해답도 없이 본문에서 시작해 본문으로 끝나는 경향이 있다. 주일 오전 11시 25분부터 12시까지를 설교 시간으로 채운다는 사실 하나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개요 작성의 도움을 받아라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에게 공식적인 설교 개요 원고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나가려는 경향이 있다. 설교 개요를 경시하는 이런 경향을 감안할 때, 우리가 명료성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설교 개요를 무시하는 게 과연 현명한 일인지를 질문하고 싶다. 좋은 개요는 언제나 명료한 의미 전달에 도움을 준다. 설교의 개요를 작성할 때 하나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처럼, 물 흐르듯이 각 대지를 앞의 것과 상호 연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용서에 관한 설교를 한다고 하자. 서론에서 이 주제를 꺼낸 이유에 대해 다룰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첫째 대지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용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둘째 대지는 이렇게 전개할 수 있다. “하지만 용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용서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종종 경험합니다.” 그리고 셋째 대지는 이렇게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용서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설교의 이 세 가지 대지는 개별적인 세 개의 진술이라기보다 하나의 대화, 하나의 이야기와 같다. 이렇게 하면 개요대로 설교할 수 있다. 개요가 뼈대처럼 개별적으로 툭툭 튀어나올 필요가 없다. 이런 면에서 첫째, 둘째, 셋째 식의 대지 유형이 의미가 있다. 즉 명료한 의미 전달에 목적을 둔다면 그런 식의 대지가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모든 설교가 그런 형태를 취한다면, 지루함을 주기 십상이다.
핵심 개념을 반복하라
이밖에 설교에 명료성을 부여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첫째, 설교의 서론에서 곧장 청중을 본론 속으로 인도해야 한다. 예를 들면, 설교자는 흔히 서론 말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때로 기적을 행하거나 우리 안에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하지만 청중도 이 정도는 뻔히 알고 있으므로 이게 설교자가 하고자 하는 말의 전부일 수는 없다. 이어서 설교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거나 우리 안에서 기적을 행하신다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렇게 말한다면, 명료성을 확보하기가 용이하다. 회중이 이 개념 자체를 알고 있으므로 설교자는 설교의 본론에서 그 개념을 명확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핵심 개념을 되풀이해 들려주는 것도 명료성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컨대, 설교 서두에서 “오늘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원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러면 이 개념을 그 뒤에서도 계속해 몇 차례 들려주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잘 모를 때 우리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에 주의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설교하는 도중에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좀 번거로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주제를 상이한 방식으로 몇 차례 재진술하는 것이 교인들의 마음에 이를 각인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설교자 자신이 지금까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간단히 재진술한 다음에 후속적인 내용을 소개하는 게 좋다.
설교의 지도를 보여주라
그 밖에도 명료성을 높이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것들을 고려할 수 있다. 대명사 사용이나 생략 어법을 가급적 피해야 한다. 대명사나 생략 어법을 사용하면 청중은 그게 무엇을 가리키는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기억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성경을 참고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보다 주제 자체를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자 할 때 우리가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성경을 참고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게 좋다.
또 당신이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지, 그에 관한 지도를 청중에게 미리 보여주는 것도 좋다. 예를 들어 로마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인과 정부의 관계에 대해 설교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부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부가 요구하는 것에 순종해야 합니다. 먼저 이 명령의 토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다음에 우리가 정부에 대한 복종을 어떻게 나타내야 하는지, 일상에서 정부에 대한 복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고 싶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 명령에 어떤 예외 조항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이런 식으로 서두에서 설교의 방향에 관한 지도를 제공하면 회중이 설교를 더욱 쉽게 따라갈 수 있다.
주제가 흥미로우면 청중은 거의 자동적으로 의문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당신이 지도 상에서 어디로 갈 것인지를 예상하면서 나중에 그 의문을 다룰 것이라고 약속한다면, 청중은 잠시 동안 그 의문을 내려놓고 당신이 말하는 내용의 나머지 부분을 들을 수 있다.
흥미의 요소를 활용하라
한편으로 요즘 설교의 시각적 측면에 대해 관심을 갖는 설교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단지 추상적인 이야기만 나열하기보다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면, 설교가 보다 명료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화를 사용하는 것은, 예화가 추상적 개념을 붙잡아 이를 삶 속에 천착시키기 때문이다. 좋은 예화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림을 그려주고 명료성과 이해를 높인다. 서투른 설교자들은 무언가 불분명한 것을 명료히 전하고자 할 때 ‘다시 말하면’이라는 말을 남발한다. 능숙한 설교자는 그 대신에 이런 말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일례로,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추상적인 진술 뒤에 ‘예를 들어’라든가 하나의 예화를 사용하면 명료성이 증가한다.
요점을 실례로 잘 설명해 주는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를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매우 강력한 힘을 갖고 있으므로 설교자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쉽게 꺼낼 우려가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요점에 빛을 비추지 못한다면 오히려 명료성이 감소된다. 그 경우 청중은 설교의 요점보다 그 예화와 설교의 관계를 찾아내는 데 정신이 쏟기 때문이다.
본문을 나중에 제시할 수도 있다
다음으로 명료성을 감소시킬 수 있고 설교자가 유혹당하기 쉽거나 어떤 우려할만한 요소들에 대해 살펴보자. 이 중에 가장 큰 것은 아마 본문에서 시작해 배경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일 것이다.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상상해 보자. “여러분에게 무언가 비밀이 있죠? 우리 각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어떤 비밀을 안고 이 예배당에 찾아왔습니다. 어떤 비밀은 드러내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어떤 비밀은 당사자를 두렵게 합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에게도 비밀이 하나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비밀에 대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야기합니다. 그는 밧세바라는 한 여성에게 죄를 범했습니다. 그녀와 간음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녀의 남편인 우리아를 전장에서 죽게 함으로써 다윗은 그 비밀을 은폐하려 했습니다. 그는 사태를 은폐하려 했지만 깊은 죄의식을 느꼈습니다. 그의 비밀이 그의 마음을 압도한 것입니다. 시편 51편에서 그는 우리에게 죄책감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이야기해줍니다.” 이것은 상당히 길게 돌아가는 길이다. 또 잘못 돌아가는 길이다.
보다 나은 접근법은 성경의 장과 절을 알리기 전에 배경을 제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여러분에게는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비밀을 안고 있습니다. 다윗도 비밀을 갖고 있었습니다. 밧세바와 함께 저지른 죄, 우리아를 살해한 죄가 다윗의 비밀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이 죄책감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시편 51편에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느낀 그 죄책감을 어떻게 다뤘는지 보게 됩니다.”
설교자가 어떤 성경 본문을 지적하면 청중은 그 본문으로 마음이 쏠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청중은 설교자가 그 본문을 당장 다루리라고 기대한다. 그런데 설교자가 계속 에둘러 가며 다윗의 죄책감에 대한 배경을 제시하고 다윗이 그 죄책감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알아보자고 이야기한 다음에 비로소 본문으로 들어간다면, 듣는 자에게 본문이 보다 명료하게 들어올 수 있다. 먼저 현대의 문제들, 성경적 배경, 주제를 논한 다음에 성경 본문을 알리고 이를 곧장 다루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는 말이다.
질문의 효과를 이용하라
내용 전환은 설교의 명료성을 유지하는 데 있어 큰 주의를 요하는 부분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용 전환 부분을 잘 다룰 수 있을까? 내용 전환이 어려운 이유는 전하려는 메시지가 설교자 자신에게 분명한 경우다. 설교자에게는 개념이 아주 명백하기 때문에 자신은 내용 전환 때 양자 간에 다리를 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다. 훌륭한 내용 전환은 앞서 이미 말한 내용을 재검토하는 것이다. 재검토 작업은 설교자에게 설교의 주제를 상기시켜 주고 뒤이어 나올 내용을 미리 예상케 한다. 내용 전환이 훌륭하면 설교자는 교인들의 마음에 요점을 확실하게 주지시킬 수 있다.
하나의 사상에서 다른 사상으로 내용을 전환하고자 할 때, 취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첫째 대지에서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하자. 그러면 둘째 대지로 넘어갈 때 설교자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자, 이건 아주 분명한 일이죠, 그렇죠?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면, 여러분의 실제 삶 속에서 이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십자가를 지는 것이, 여러분의 사업장이나 가정에서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요?” 전환적인 질문들은 다음 요점으로 넘어가면서도 명료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설교의 결론 부분과 명료성
다음으로 설교의 명료성을 유지하는 데 있어 결론을 어떻게 이끌어가야 하는지에 대해 알아보자. 강력한 결론은 설교의 초점에 불을 붙여준다. 이를 통해, 서론에서 제기한 질문으로 되돌아가 설교자는 청중에게 모종의 만족감과 홀가분함을 줄 수 있다.
우선 불분명한 설교를 결론 하나로 만회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럼에도 결론 자체가, 예를 들어 설교의 마지막 5분을 명료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설교를 구제(救濟)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결론은 명료성을 소급적으로 창출할 수 없다. 결론이 요점을 정확하게 주지시키고 요점을 잘 보여준다고 해도 청중은 여전히 설교자가 앞에서 25분 동안 이야기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설교자의 신체 이동을 통해서도 설교의 명료성을 창출해 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설교의 첫째 대지를 말하는 동안 강단의 우측 즉 청중의 오른편에 서 있었다면, 둘째 대지로 넘어갈 때는 강단의 좌측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어서 셋째 대지로 넘어가면 다시 왼편으로 이동한다.
그 대지 혹은 요점을 확실히 말한 후에는 몸을 자유롭게 움직여도 좋다. 그러나 어떤 특정 요점나 대지를 재검토할 때는 처음에 그 대지를 말할 때의 위치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런 종류의 특정 움직임은 구두로 말한 내용을 더욱 강화시켜 준다. 설교 때에 별로 움직임이 없는 설교자라면, 단순히 머리 위치만으로도 동일한 효과를 달성할 수 있다.
첫째 대지를 말할 때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우편을 바라보고, 둘째 대지를 말할 때는 중앙을, 셋째 대지를 말할 때는 좌측을 바라보는 식이다. 입으로 말하는 내용을 몸으로 강화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원칙은 처음에 정해 놓은 자세들을 끝까지 잘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강조한 다른 원칙들과 아울러 설교자가 명료한 설교를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