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11) 교회가 사역자를 위해 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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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교회들은 사역자의 영향력에 의해 운영이 되고, 또한 움직입니다. 교회의 중요한 사항들을 직접 결정하기도 하며, 재정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도 직접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들은 오히려 많은 교회들로 하여금 기형적인 교회의 형태를 갖추도록 한 것이 사실입니다. 회원이 많고, 재정적인 능력이 있는 교회 안에서 사역자가 이러한 모습을 가질 때에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지만 미자립 교회에서는 많은 문제를 낳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는 이유도 바로 이 문제가 해결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자립 교회에서 목회자가 모든 것을 주관하도록 한다면 자연히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자들은 전임 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기형적인 교회로 가는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당연히 목회자가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올바른 교회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1. 목회자가 교회의 도움 없이 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한 교회의 담임목회자로 사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활이 어려워서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그분들은 이미 주님께 헌신을 했고, 또한 매우 유능한 목회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일을 해야만 했고, 그것은 성도들을 위해 소비되어야 할 많은 시간들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목회자가 매우 한가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의 주변에는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목양의 일보다는 육신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돌아보는 일보다는 각종 취미와 오락에 더 관심이 많은 자들입니다. 물론 이러한 목회자는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능히 목회자들이 매우 한가할 것이라는 추정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한가한 시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께서 하시던 목양의 일을 대신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역자들을 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성도들을 눈동자와 같이 지키신다는 말의 뜻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신32:10,시17:8) 아는 바와 같이 눈동자는 조금이라도 부주의하게 다루면 크게 손상을 입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게 되면 몸에 치명적인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소중하고, 안전하게 보호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목회자가 성도들을 이와 같이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목양의 일이 아닌 다른 일로 바쁘다면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목회자가 성도들을 돌아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목회자의 사역에 협조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히게 생각하기도 하고, 그가 가르치는 것에 불만을 갖기도 합니다. 또한 목회자가 여유롭게 사는 것에 대하여 시기하기도 하며, 가르치는 것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히려 그 주변의 상황에 관심을 가짐으로서 목회자를 힘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결코 교회의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유능한 목회자의 힘만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충분하게 사역의 모든 부분을 지원함으로서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목회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2. 목회자의 설교가 날카롭다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목회자의 설교가 날카롭다구요? 분명히 그 목회자는 유능한 분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을 검(칼)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엡6:17,히4:12) 만일 검이 무디어져 있다면 그것이 무슨 역할을 할 수 잇겠습니까? 검은 날카로웠을 때 그 역할을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전하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향해 전해질 때 만일 아픔을 느끼고, 마음 곳곳이 말씀에 의하여 잘라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면 그 목회자는 분명히 유능한 분입니다. 그분은 이미 검, 즉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갈고 성도들 앞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 분입니다.
물론 우리의 주변에는 두 종류의 거짓 전도자들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성도들이 듣기 좋은 소리를 계속 말함으로서 귀를 즐겁게 하는 자이며, 또 다른 부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세상의 기준과 잣대를 사용하여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결국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여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하고,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사역자라면 당연히 성도들이 듣기에 날카로운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종종 성도들이 설교자의 말씀이 자신에게 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물론 그분들에 대하여 나는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선포되어지는 말씀이 회중과 관계가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에게 직접적으로 느껴질 만한 말씀이 주어졌다면 그는 매우 큰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조차도 느끼지 못하고 지나갈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하는 자에게 제한을 두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가끔 성도들은 설교자에게 와서 이러이러한 설교는 하지 말아달라고 말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역자와 교회를 무능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전하는 것에 제한을 둔다면 그것은 기형적인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하는 일은 당연히 사역자에게 일임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신실한 사역자는 기도할 것이고,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 교회에 유익한 것을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전하는 진리가 변질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현대 교회 안에서 변질된 많은 교회들을 봅니다. 그들은 매우 신실하게 시작을 했으며, 오직 성경을 중심으로 바른 진리를 가르치는 일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가 아닌 기업과 같은 집단으로 변해갑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교회의 운영이 변하는 것은 시대가 변하면서 오는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으므로 큰 문제가 아니라고 볼 수 있겠지만 실제로 가장 큰 문제는 진리가 변질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 안에서 진리가 변해가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목회자에 의해서 그러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 진리의 변질은 성도들의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갑작스러운 교회의 성장은 성도들에 의해서 목회자를 우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성경보다도 목회자를 더욱 신뢰하는 교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목회자가 비 진리를 말해도 고개를 끄덕이며 "아멘"이라고 말합니다.
보다 적극적인 성도는 목회자에게 비 진리를 요구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가령 오늘날 교회들이 점차 카톨릭화 되어가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각종 의식을 교회 안에 정착시키고, 절기들을 지키고, 심지어 교회들이 교단화되면서 목회자로 하여금 명예를 얻도록 수십 억의 돈을 주면서 눈을 멀게하고,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자들과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는 일들을 외면하고, 오히려 사회 단체에 기부하게 함으로서 스스로 이름을 높이려는 행동들이 누구에 의해서 진행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오히려 목회자들이 한다고 말하더라도 말려야 하는 것이지만 오히려 성도들은 목회자를 협박해서라도 그러한 변질된 진리들에 대하여 교회 안에 정착시키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목회자들이 바른 진리를 가르치려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들을 봅니다. 가령 종전의 교회에서 사도신경을 외웠는데(이것은 한국교회에서만 있는 것임), 목회자가 성경적으로 옳지 못함을 발견하고 외우지 말도록 가르쳤을 때 성도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많은 목회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절반 이상의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항의를 하고 관철되지 않자 교회를 떠났다고 말합니다. 왜 그러한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까? 그들은 목회자가 전하는 진리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핍박을 면해보겠다는 생각으로 목회자를 곤경에 빠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고수하려는 소수의 무리들은 언제나 핍박을 받아왔지만 그들은 스스로 넓은 길을 가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행동들은 때때로 목회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며, 결국 바른 진리를 교회 안에서 가르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습니다.
대표적인 또 하나의 예를 봅시다.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서는 약 100년 동안 개역 성경을 사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이 내용상 많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고, 한국의 교회들은 대부분 이 성경에 기초해서 교리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훌륭한 신학자들이 배출이 되고, 또한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인하여 성경의 문제점들을 보완하고, 급기야 바른 성경을 제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이 성경을 쓰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표면적으로는 다른 많은 이유를 내세우지만 실상은 크게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바른 성경을 사용했을 때, 자신들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교리들이 많은 허점을 드러낼 것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혹시 이단이라고 정죄를 받을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한국 교회는 겁 많은 목회자들로 넘치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무엇을 하는 자입니까? 그는 바른 진리를 가르쳐야할 책임이 있는 자입니다. 이는 만일 잘 못된 진리를 가르쳤다면 바로 잡아야 할 책임도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당연히 목회자가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만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가르치고 있다면 현재의 상황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목회자가 계속해서 진리를 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건강한 교회를 세울 수 있는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목회자를 겁쟁이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진리를 말해야만 하는 자들입니다. 만일 그 일을 교회의 지체가 된 성도들이 막고 있다면 이는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리를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4. 성도들은 사역자의 시간을 빼앗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과로로 인하여 병원에 누워 있는 목회자들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분명히 유능한 분들입니다. 왜냐하면 주를 섬기는 일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누워 있는 동안에는 성도들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는 병원에서 성도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종종 과로로 인하여 사역을 중단하는 목회자들도 봅니다. 물론 그들은 매우 유능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쓰러진 것은 성도들뿐만이 아니라 주님 편에서도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 과로로 인하여 쓰러지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당연히 성도들로 인한 것입니다. 아무리 우둔한 목회자라도 자신의 취미 생활과 오락을 하면서 피로해 하고 쓰러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가 잦은 심방과 상담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성도들에게 많은 문제들이 발생이 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목회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들을 준비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없게 합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목회자를 위하여 배려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을 터득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목회자의 시간을 빼앗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만 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세월이 흐르면 영적으로 오히려 힘이 없는 경우들을 봅니다. 그들은 분명히 최선을 다해서 사역을 감당해 왔던 분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요5:39), 기도할 시간(행6:4)을 가지지 못함으로서 자연히 자신의 경험에 설교를 의존하게 되고, 사람들의 반응에 대하여 민감해 짐으로서 바른 복음을 전하지도 못하고, 또한 성도들에게 만족할 만한 양식, 즉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성도들이 큰 손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목회자가 능력이 부족하다고 탓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원인은 바로 성도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도 많은 시간들을 빼앗음으로서 목회자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목회자로 하여금 더욱 많은 시간동안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5. 사역자가 생계비로 인해 염려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사도 바울의 예를 들어 자비량으로 목회를 하는 것이 더욱 성경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목회자의 일을 했던 것이 아니고, 복음 전도자의 일을 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만 하고, 또한 많은 교회들로부터 지원을 받아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고후11:9). 뿐만 아니라 목회자가 자신이 일한 것에 대하여 그 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결코 자비량 목회를 권한다는 것이 성경적인 원리라고 고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목회자로 하여금 이중의 부담을 지우는 것이므로 신실한 목회를 원하는 성도들이라면 당연히 목회자의 생계 문제에 대하여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의 주변에는 많은 목회자들이 그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터로 나가는 경우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일터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마음이 목양의 일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것은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그러한 것이 성도들의 무관심으로 인하여 발생이 되고 있는 것이라면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목회자의 생계비가 자신들의 생활과 무관한 것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원리만을 생각해도 결코 옳지 않은 것입니다. 율법시대를 살았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생활비를 쪼개어 제사장 지파인 레위사람들의 생계를 뒷바라지 했습니다. 12지파가 1/10을 드렸고, 또한 각종 드려진 헌물들을 그들이 먹도록 배려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고, 또한 섬기는 자들이 최소한 생계를 걱정하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자입니다. 물론 오늘날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목회하는 자들을 따로 둘 필요가 없다는 집단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경적으로도 가당치 않은 주장입니다. 주님은 분명하게도 교회 안에 섬기는 자들을 두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의 일에 전념하도록 그분의 일을 위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성도들은 그들의 생계를 뒷받침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일에 대하여 성도들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고전9:4-12). 주님의 일을 맡은 목회자에게 책임이 부여된 것이라면 그가 섬기고 있는 성도들 역시 동일한 책임이 부여된 것입니다. 성도들은 마땅히 목회자의 생계를 돌봐주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는 것이며, 또한 주님의 명령에 대하여 순종하는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합니다.
6. 교회는 사역자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목회자를 존경하며 그들을 따릅니다. 그들이 목회자를 따르는 방법은 비록 다르지만 그들이 목회자에 대하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신앙적으로도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목회자를 따름에 있어서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좋은 것들을 선물하고, 그들의 생활을 도우며, 그들이 사역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모든 힘을 다하는 것이 자신들이 할 수 잇는 최선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도움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작 목회자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것은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잇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들어갔을 때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행12:5). 그것은 그들이 할 수 잇는 유일한 것이자, 베드로를 위한 최고의 수단이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베드로는 천사의 손에 의하여 감옥에서 나왔고, 그들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결과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도 역시 각 교회를 향해 보내는 서신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왜 이처럼 사역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중요할까요? 그 답은 간단한 것입니다.
먼저 목회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입니다. 만일 그가 영적으로 침체에 빠지게 된다면 자연히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바로 영적 침체에서 건져낼 수 있는 중요한 무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목회자로 하여금 매사에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기도하는 자가 목회자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곧 목회자가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필요한 것들을 적절하게 공급함으로서 사역의 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힘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사역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을 수 있는 통로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전혀 소망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교회! 바로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세워갈 수 있는 중요한 수단임을 언제나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