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개척 실패를 하게 된 이유
본문
① 성도들에게 주체 의식을 심어 주지 못했다.
목사가 교회를 개척하는 주체가 되었을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교회를 개척하는 목사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점이 많다. 그러나 한 가지 일어 날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하면 교회가 안정된 교회 되는데 큰 장애 요소로 작용한다.
목사가 주체가 되어 세워진 교회에 등록한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교회이지만 목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교회 의식을 떨어버리지 못한다. 목사의 교회에 마치 손님이나 시집을 온 며느리 같은 의식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는 것이다. 즉 교회가 '내 교회'라는 의식이 결여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회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불식시켜 교회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심정을 성도들에게 심어 주지 못하면 조그마한 불만도 견디지 못하고 교회를 미련 없이 떠나 버리는 상황이 벌어진다. 내가 아파트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했을 때 제일 많이 경험하고 당황한 일이 이런 류의 일이였다. 장로가 되었어도 교회를 쉽게 떠나고, 안수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집사가 되고 구역장이 되었어도 조그마한 불만이 생기면 교회에 대한 아무런 미련을 가지지 아니하고 교회를 떠나 버렸다.
그러므로 이런 손님 같은 교회 생활을 불식시키기 위한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 우선 교회의 모든 일을 직접 참여하여 주장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 재정 관리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장치를 해서 마치 자기들이 교회를 운영하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고도의 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을 직접 챙기시고 섭리하시고 다스리신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나 존재할 수도 없고, 생명을 호흡할 수도 없으며 생성과 소멸의 역사를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고 진행시키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 점에 대해 인간은 아주 탁월한 어리석음으로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고 살고, 죽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잘 살기 위해 노력하고 만족하고 소망을 가진다. 이런 것들이 이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이런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많았다. 이런 신학적 논쟁을 칼뱅의 기독교 강요에서는 '인간의 자유 의지'라고 하였고 이에 대한 논박이 심했다고 했다. 이런 신학적 논박이 신학을 발전시키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세상 섭리에 대한 더욱 명백한 성격적 해답을 찾아내게 된다.
개척 교회의 목사는 이런 하나님의 지혜로운 다스림이 있어야 한다. 모든 일은 목사가 하지만 새로 등록한 교인들이 하는 것처럼 하게 하는 고도의 지혜로운 교회 섭리가 있어야 한다. 이런 지혜가 없으면 아무리 강조해도 성도들은, (특히 아파트 지역의 성도들은 자기가 살고 잇는 아파트를 영구히 살 가옥으로 생각하지 않고 대게 3년 정도 살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자기 교회 의식을 가지지 아니한다. 이런 점이 안정된 주거지역에서 10년 20년을 한 교회를 섬기는 충성된 성도와의 교회에 대한 애착심에 있어 큰 차이가 나는 점이다.
②. 성전 건축에 대한 열망이 실패의 원인이다.
성도들이 추가로 헌금을 하자고 했을 때 목사는 말려야 했다. 그러나 목사 자신의 심중에도 100평의 대지에 50평의 건물을 짓는 것은 마음에 차지 않아 더 넓은 대지를 구입하자는 데에 은근히 심정적 동조를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열망이 나로 하여금 그런 못된 장로의 장난에 놀아 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만일 내가 성전 건축에 대한 무리한 욕망을 가지지 않고 일차에 주신 은혜로만 성전 건축을 시도했더라면 그런 장로의 유혹에 넘어 갈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③. 사람을 잘못 만났다.
우리를 사기한 장로에 대한 이야기다. 이런 사람을 만난 것도 나의 과욕으로 인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2. 추가하여 몇 가지 교회 개척의 실패를 첨가하면 다음과 같다.
⑴ 대 교회 주의를 모방하며 목회를 시작하는 것이다.
개척 교회는 아주 작은 교회를 시작하는 것이다. "사울의 옷을 입은 다윗"처럼 시작해서는 안 된다. 한 영혼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처음부터 대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대 교회가 되더라도 목사는 한 영혼의 소중함을 잊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몇 사람되지 아니한 작은 교회에서 한 영혼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한 체 이루어지지도 않는 대 교회만 꿈꾸고 있으면 안 된다.
⑵ 장소를 잘못 선택하면 실패한다.
주님께서 던지라고 하신 깊은 곳에 고기가 있다. 그곳을 찾아야 한다. 교회를 세우는 장소는 교회 설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척 교회의 좋은 장소는 대도시 변두리 지역에 새로 형성되는 고밀도 주거지다. 그러나 장소가 아무리 좋아도 교회가 장소로 인하여 성장하는 기간은 교회를 설립한 1년 동안이며, 그 후에는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 후에는 목사의 설교와 인격, 영력, 부지런함 등등이 교회 성장을 좌우한다. 어떤 사람은 지나친 경제적인 부담을 가지고 교회를 설립하여 파산하기에 이르고,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형편에 맞추어 교회를 설립하다 보니 성장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곳에 교회를 설립하여 좌절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사명이 없는 성도들과 교회를 설립하였기 때문에 교회에서 배척을 당하는 일도 흔히 있는 일이다.
⑶ 교회 성장에 절대적인 영향이 되는 목사의 설교 신령한 생활.
장소로 인해 성도들이 잘 모이는 시점은 약 6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 후는 장소 때문에 잘되던 교회도 목회자의 목회 신학이나 교회의 운영 방침, 설교 또는 목회자의 신령한 생활은 많은 다른 요소로 말미암아 실패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성도들이 장소나 교회 건물을 보고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하여 교회를 다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목회자와 교회에 신령한 은혜가 결핍이 되면 아무리 좋은 장소와 풍부한 경제력과 좋은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도 성도들은 그 교회에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며, 몸 바쳐 헌신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의 영감 기르기는 교회 성장에 절대적인 요소가 된다. 기도 생활, 성경 묵상 등 극히 기본적인 신령한 생활을 잘해야 할 것이다. 성도들은 목사를 닮는다고 한다.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 되도록 하나님을 섬기며 충성하는 일에 앞장을 설 것이며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종으로서만 살아가는 '스스로 죽음'의 생활이 필요하다.
(4) 다른 교회와 차별화 된 예배 형식과 교회 프로그램을 가지지 말라.
예배 순서 차별화, 교회 분위기 차별화, 설교의 차별화 등 다른 교회와의 차별화를 시도해서는 안 된다. 이런 차별화는 새로 교회를 찾아 온 성도들로 하여금 필요 없는 경계심을 불어 일으켜 다시 오지 않게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부언할 것은 우리 정통적인 교회들이 드리는 예배 순서는 구약의 제사법을 기초로 한 신약적 예배 형식으로서 누군가에 의해 자의적으로 짜여진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입각한 형식이라는 것이다.
내가 아파트에서 교회를 처음 시작했을 때 강단에 절기를 알리는 휘장을 놓았더니 어떤 성도가 전화를 해서 이단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심지어 강단에 펴놓은 성경을 보고도 다니던 교회는 그런 것이 없었는데, 왜 그런 것(성경)을 그렇게 펴서 놓았는가 라고 물었다. 설교와 기도, 찬양 등이 잘 짜여져 있어 규모 있게 진행되는 것은 새로이 교회를 찾아 온 성도들에게 많은 호감을 줄 것이다.
(5) 교회 재직 임명을 서둘러서는 안 된다.
개척 교회는 언제나 일군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래서 새로이 등록한 성도들의 인적 사항만 보고 교회의 중직을 맡기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나 나는 집사가 아닌데도 집사라고 속이는 사람을 보았고, 구역 권찰을 했으면서도 구역장이였다고 말하는 사람을 보았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지만 교회의 일군을 세울 때 전에 다니던 교회의 목사나 다른 사람들을 통해 그들의 신앙 전력을 탐색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그것이 어려울 경우에 일대 일로 만나는 기회에 전에 다니던 교회와 목사에 대하여 물어 보면 그가 쓸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다. 즉 다니던 교회나 목사에 대하여 불평을 하고 허물을 들어내는 사람은 요주의 인물이며, 반대로 교회와 목사를 잊지 못해 그리워하며 등록을 늦추는 사람은 참으로 쓸만한 사람이다. 충분히 살펴보고, 교육을 한 다음에 일군을 세우도록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 매우 좋은 일이다.
(6) 동네 교회에서 이동해 온 성도들을 조심해야 한다.
바로 옆 교회에서 이동한 성도나 이웃 교회에서 이동한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경계를 해야 하며 심정적으로 받아 들여서는 안 된다. 내가 아는 어떤 목사는 큰 교회 옆에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부스러기 성도들만 모아도 교회가 잘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철부지 소리를 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일이다.
목회 윤리에도 맞지 아니할 뿐 아니라 바로 자기 교회를 옆에 놔두고 이웃 교회로 교회를 옮기는 그런 양심이 어떻게 충성스러운 교회의 일군이 되겠는가? 이런 사람일수록 일 년이나 이 년 동안은 정말 충성스럽다. 마치 자기의 양심적 괴로움을 새로 이동한 교회에 충성하므로 사죄를 받으려는 듯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번에는 더 나쁘게 가난하고 어려운 개척 교회와 목사를 괴롭힌다. 틀림없이 그런 짓을 한다. 그리고 다른 교회로 가 버린다. 절대 속아서는 안 된다. 그런 류의 인간들은 장말 못 쓸 죄인들이다.
(7) 자기 주장이 강한 성도를 경계하라.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은 모든 일에 있어서 '내 생각에는-----'이라는 식의 발언을 하기 좋아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기를 다반사로 하며 자기의 의사가 관철되지 아니하면 대단히 기분이 나빠한다. 이런 사람은 교회를 개척할 때뿐만 아니라 언제나 경계의 인물로써 교회의 중책을 맡겨서는 안 될 것이다.
(8) 목사의 독단적인 목회 방식.
목사의 독단적인 목회 방식은 교회의 능력 즉 성도들의 능력을 저하시키는 원인이 된다. 목사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교회를 받들어 섬기는 사람이지만 독재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목사가 생각하고 추진하는 일에 성도들의 생각이 따르지 못할 경우에는 인내하며 참아 따라 오도록 만들어 시행할 것이다. 목사의 생각 보다 우월한 생각은 겸허히 수용하여야 한다. 그런데 목사가 이런 인내심과 수용력을 갖추기가 그리 쉽지 않다.
교회가 작던 크던 하나의 집단의 수장이 되어 지휘 감독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조금만 자기 절제를 개을리 하면 모든 일을 혼자 생각하고 결정하며 추진하기 쉽고, 교회 재직이나 다른 성도들이 목사의 생각에 끼어들거나 반대할 경우에 기분 나빠하고 귀찮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날마다 잘되기를 소원하는 교회의 진로를 목사 스스로 가로 막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도들은 한두 번 목사의 이런 독선과 아집과 고집을 용납하지만 그것이 개선되고 고쳐지지 아니하면 목사 퇴임 운동을 한다던지 아니면 교회를 떠날 구실을 찾아 결국 목사 곁을 떠나 버린다.
나는 나의 성격상 이 점에 결정적인 약점을 가졌다. 평생을 고치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지만 잘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랑을 주고받았던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고 나도 괴로움을 당해야 했다. 오랜 후에야 내가 왜 이 자기 과대평가의 굴레이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고치지 못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본 결과 "하나님 종"의 자세와 마음가짐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목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하나님의 종일뿐이다. 이 사실을 망각한 체 교회 어른 노릇을 하려하고, 지도자 노릇을 하려하며, 성도들의 영적 부모 노릇을 하려 하면 틀림없이 목회에 쓰리고 아픈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교회를 개척하는 사람들이 철저한 복음적 신학에 입각한 목회 신학과 교회 운영을 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처음에 세워질 때 잘못된 신학과 인간적인 이상(理想)이나 성취욕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아닌 종교 기업으로 세인(世人)의 조롱을 받게 되었다. 교회의 거룩함과 신성함을 잊어버린 것이다. 교회는 장사꾼들이 장사하는 시장이 아니며, 주님이 말씀하신 데로 강도의 굴혈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