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목회란?
본문
요한복음 1장 1-14절까지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로고스이며 어두움의 세상을 비취는 빛이요, 육신을 입어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친다. 사도 요한은 아주 단순하고 평범한 비유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성육신을 쉽게 깨달아 알 수 있게 만든다. 그리스도는 빛이요, 세상은 어두움으로 가득하다. 어두움으로 가득한 세상에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니 이 세상을 덮고 있던 어두움은 물러갈 수밖에 없다. 깜깜한 어두움을 상상해 보자. 달 빛도 별 빛도 없는 밤, 비가 추적거리며 내리는 밤, 가로등도 없고, 전기 시설도 없고 전지나 등불이나 횃불이나 어떠한 빛도 없는 시골길을 상상해 보자. 그 어두운 길을 수많은 사람들이 더듬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이 때에 저 멀리서 등을 든 사람이 다가오고 있다. 그 사람 주위에는 어두움이 물러가고 있다. 그 사람이 가는 곳마다, 그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빛을 보며, 밝음을 본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한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한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 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사9:2)
마태는 오신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스블론 땅과 해변길과 이방의 갈리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4:15-16).
예수님은 흑암속에 들어 오셔서 어두움으로 고통 당하는 자들을 밝게 비취는 큰 빛이요, 사망의 땅에 앉은 자들에게 생명을 전달하는 구세주이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만난 자들은 그리스도의 빛으로 밝음을 얻을 것이다. 아무리 칠흙같이 어두운 곳에서 신음하던 자들이라도 큰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은 찬란한 빛의 영광을 얻을 것이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9-12)
신약성경은 여러가지의 어두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질병의 어두움, 결핍의 어두움, 죄악의 어두움, 부정의 어두움, 불구의 어두움, 사탄과 귀신의 어두움 …… 등등 갖가지 어두움이 이 세상을 뒤덮어 이 세상을 어두움의 세상으로 만들고 있다. 문둥병자의 어두움을 생각해 보자. 그는 날마다 자기의 지체들 중에 하나씩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공포를 느끼고 있다. 그는 사랑하는 이들에게서 격리되어 외로움으로 몸부림치고 있다. 죽을 때까지 고칠 수 없는 저주의 병을 가졌다는 생각으로 좌절과 원망과 분노에 떨고 있다. 그는 어두움으로 뒤덮인 깜깜한 지옥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문둥병자를 만났을 때에 그는 깨끗이 고침을 받고 감격과 기쁨으로 가득한 빛의 사람이 되어 예수님을 힘있게 증거하고 있다.
목회는 어두움 가운데 앉은 백성들에게 참 빛이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그분의 빛으로 어두움을 물리치고 빛의 영광 가운데에 들어오도록 사람들을 돕는 일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사람들이 지금 어떠한 어두움으로 고통당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며, 참 빛이신 예수님을 그들에게 소개하며, 예수님께서 그들의 어두움을 어떻게 물리치고 밝음으로 가득하게 할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는 참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지금 어떠한 일을 하라고 하시는지를 분별하고, 그리스도께서 명하시는 그 일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여야 하는 것이다. 목회는 언제든지 빛이신 예수님, 목자이신 예수님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하며, 예수께서 하시고자 하는 그 일을 목회자는 신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 특히 복음서를 중심으로 하여 빛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어두움을 물리치고 어두움의 세상을 밝음으로 채워 가고 있는지를 보면서 목회의 중심 주제와 모델을 발견하고자 한다.
1. 결핍이 있는 곳에 생수로 넘치게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은 목마른 자들을 부르시는 분이시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은 죄인들을 찾으시며(마10:11-13),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 하는 자들을 부르신다(마11:28-30).
예수님은 부족한 자들을 부르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러 풍성한 생수로 채우시는 분이시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8).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인생을 상상해 보라.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성령의 생수요(요7:39), 사랑과 기쁨과 평강의 생수요(갈5:22), 새 창조와 치유와 은혜의 생수이다(겔47장 참조).
시편기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3)고 노래한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목마른 자들에게 생수의 강으로 흐르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 복을 받는다.
한국교회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죄를 씻는 것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 씻음의 십자가요, 예수님은 지금 우리의 중보자로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은(요일2:1-2, 롬8:34) 사실이다. 그리고 죄 용서는 우리의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은 죄를 씻으시는 예수님만 보여주지 않고 넘치게 채우시는 예수님을 더 많이 보여주신다. 그릇을 씻어 깨끗하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딤후2:20-21). 그러나 그 그릇에는 보배로 채워져야 한다(고후4:7). 깨끗하게 씻겨졌으나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는 빈 그릇을 생각해 보라. 그것은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고전13:1)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그릇은 먼저 씻겨져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그릇은 하나님의 보배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 생수이신 그리스도 생명의 떡이 신 그리스도, 말씀과 지혜이신 그리스도, 은혜와 진리이신 그리스도는 진정한 하나님의 보배이다. 이 보배로 우리의 질 그릇을 채우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결정적이다. 성경은 풍성한 은혜로 우리를 채우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거듭하여 가르친다. 이제 한국교회는 씻는 것만 강조하는 교회가 아니라 풍성하게 채우시는 그리스도까지 강조할 수 있어야 한다.
⑴ 목자이신 예수님
시편 23편은 여호와 하나님을 크신 목자로 비유하여 말씀하신다. 우리의 목자되신 하나님은 우리를 부족함이 없이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 그처럼 사랑을 받는 시편 23편은 넘치게 채우시는 하나님을 강조하신다. 우리 하나님은 징계나 채찍이나 용서나 씻음보다는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양들로 풍족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원수의 목전에서도 상을 베푸시며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시고 우리의 잔을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신다.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이사다(요10:14). 그분은 양들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시는 선한 목자요,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는 사랑의 목자이시다. 예수님은 자기가 오신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밝힌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다"(요10;10). 그러나 예수님께서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10:10).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세 가지 중요한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①어째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 해야 했는가? ②예수님은 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해야 했는가? ③인간은 왜 예수님을 믿어야만 하는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영생"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쉽게 영생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며, 믿는 사람들이 죄의 심판을 받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물론 영생이라는 단어는 이런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생은 그보다 더 큰 뜻을 담고 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신중하게 생각한다면 영생(eternal life)은 이 세상의 어느 누구에게도, 어떠한 존재에게도 없는 것이요,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생명임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피조세계의 모든 것은 이미 시작이 있는 존재요 따라서 그 끝이 있을 수밖에 없다. 저 산들도, 바다도, 저 하늘의 별들도, 인간의 영혼까지도 시작이 있으며 끝이 있을 시간적인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존 하시는 분이요 영생을 가지신 분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믿는 자들이 받을 것은 영생, 곧 하나님의 생명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 속에 없었던 것인데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자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자, 곧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선물로 받는 자들이다. 믿는 자들의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다. 이 생명은 죽음에서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이요, 미움을 사랑으로, 질병을 건강으로, 죄악을 성결로, 저주를 축복으로, 멸망을 구원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놀라운 능력이 믿는 자들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그런데 이 능력은 곧 성령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 가운데 오셨다. 아골 골짜기, 뼈들이 널려 있는 죽음의 땅인 내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오셨다.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요,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서 믿는 자들에게 들어오셨다. 당신은 지금 사망의 땅, 죽음의 그늘에 있다고 해도 당신이 믿는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능력으로 당신에게 오셨기 때문에 빛의 영광으로 빛나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그분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요한복음 4장 14절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게 하는 영생의 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말씀이다.요한복음 7:38-39절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생수가 우리의 배에서 강이 되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들인가? 예수님은 부족함이 없이, 넘치게 양들을 채우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이시다.
목회는 "나의 잔을 넘치게 하시는" 우리 주님을 소개하여 그 주님으로 성도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더 풍성하게 하도록 도웁는 교역자들의 삶이다.
⑵ 가나안 혼인 잔치에 오신 예수님
요한복은 2장 11절은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혼인 잔치를 축복한 기적을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행하였다고 말씀한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의 대 드라마를 연출하는 가운데 포도주가 모자라 고통하는 혼인잔치에 새로운 포도주를 만들어 공급함으로 이 드라마의 첫 번째 장을 열고 있다. 이 기적은 예수님의 대 사역의 첫 번째 시작이요, 앞으로 행하실 전 구원사역의 내용을 암시하는 것이요,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일을 요약적으로 계시하는 기적이다. 그러므로 가나의 기적을 좀 더 깊이 검토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구원의 대 드라마의 깊이를 여는 열쇠가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내용으로 특별한 주석이 필요없는 것이다.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청을 받았다.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모자라 고난에 빠진 것을 안 예수님의 어머니가 이 사실을 예수님께 말하고, 예수님은 하인들을 시켜 물로 된 포도주를 연회장에게 가져다 주게 한다. 이 포도주를 맛본 연회장은 처음보다 더 좋은 포도주가 나중에 나왔다고 기뻐한다. 제자들은 이 기적을 보면서 예수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특별한 설명도 없고, 해설도 없고 오직 이 기적이 예수님이 행하신 처음 표적이라고만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적을 통해 예수님은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었다고 말씀하신다. 이 표적은 영광스런 예수님이 모습을 드러내실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비밀을 계시한다.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는 곳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계시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 바로 이런 기적이 계속하여 이 땅위에 일어나야 된다.
그러면 가나의 기적은 오늘에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주시는가? 이 기적은 혼인잔치집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즐거움, 감격, 사랑, 기쁨, 축하, 먹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는 혼인잔치집을 상상해 보자. 혼인잔치집은 우리에게 긍정적이요, 적극적이요, 넘치는 이미지를 우리에게 주지 않는가?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가 아직 잔치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깨어져 버리고, 부정적이요, 비판적이요, 불안한 분위기로 바뀌어 버린다. 혼인잔치에 가장 필요한 포도주가 모자랐으니 주인도 손님도 다같이 불안과 불만과 원망등으로 얼굴이 어두워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어두움의 그림자는 오히려 더 찬란한 빛의 전주곡이 되고 있다. 어두움이 있으므로 거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의 기적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두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기회요, 구원의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포도주가 모자라 근심과 원망과 불만 가운데 빠져 있던 가나의 혼인잔치는 예수님의 등장으로 이전보다 더 넘치는 풍성한 잔치 자리로 바뀌고 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고 제자들에게 믿음을 더하고 주인들과 손님들에게 더 큰 감격과 기쁨과 만족으로 가득해 지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를 보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모든 좋은 것으로 가득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신명나는 삶을 살게 하셨다. 이곳은 잔치집과 같은 낙원이요, 긍정적이요, 적극적이요, 충만한 동산이었다. 하나님은 넘치는 인간, 기쁨과 감격과 사랑으로 가득하며, 모든 좋은 것으로 만족을 얻는 잔치집을 계획하셨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음으로 그들은 잔치집에서 쫓겨나 땀 흘리며 수고하며, 해산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거치른 땅에 살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인간의 운명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은 잔치집을 만드셨으나 인간의 죄악은 비참한 광야를 선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다. 우리는 포도주가 모자란 가나의 혼인잔치집같이 불만과 불안과 원망과 절망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어두움의 사람들이 되었다. 오늘 이 지구를 덮고 있는 어두움의 그림자를 보라. 포도주가 모자란 잔치집 같은 저기압을 보라. 그런데 예수님이 육신을 입어 어두움으로 둘러싸인 잔치집으로 들어 오셨다. 그 분은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잔치집에 영광의 빛을 비추시기 위해서 거기에 오셨다. 예수님은 욕망과 이기주의로 가득한 인간의 피를 영원한 하나님의 성결한 피로 바꾸어 모든 인류를 덮고 있는 죄의 그림자들을 씻어내며, 생명의 떡이 되고, 영생의 포도주 잔이 되어, 어두움의 인간들을 광명의 새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시며, 하늘 나라의 충만으로 넘치게 하시는 새역사를 창조하시고 있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인간의 구원사의 축도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드라마를 여는 문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의 축도를 제시하며, 우리에게 어떠한 구체적인 구원이 오시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모든 인간은 너 나 없이 아름답고 즐겁고 기대와 감격에 넘치는 잔치 집으로 세상을 시작한다. 새 생명을 시작하는 출산의 순간을 생각해 보라. 새 가정을 시작하는 결혼의 순간을 상상해 보라. 새로운 직업을 얻어 첫 출근을 하는 감격을 생각해 보라. 목사로 임직하는 순간의 축하와 박수를 생각하라. 어느 하나라도 출발의 순간에 감격과 아름다움과 축복으로 가득하지 않는게 있는가? 그러나 타임머신을 타고 조금만 지나가 보라. 축복 속에 태어난 어린이에게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행복한 부부에게 어떤 어두움이 다가오고 있는지, 새로 취직한 직장에서, 새로 들어간 학교에서, 새로 위임받은 직책에서 어떤 신음 소리가 들리는지 자세히 드려다 보라. 거기에는 에덴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의 고통이 있을 것이요, 포도주가 모자란 가나의 혼인잔치의 어두움이 가득할 것이다.
예수님은 어두움의 땅, 모자람의 장, 고난의 자리에 오시는 분이시다. 그 분은 바로 거기에 빛으로, 충만으로, 평강의 왕으로 오신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그 영광을 나타내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다. 충만하게 하신다. 예수님은 거기에서 미움을 사랑으로, 어두움을 빛으로, 불만을 충만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재앙을 영광으로, 불안과 싸움을 평강과 화해로 바꾸신다. 이전보다 넘치는 기쁨으로 그곳을 충만케 하신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다.
우리의 목회는 이 확신 속에서 시작해야 한다. 아무리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덮인 가정이나 성도들일지라도 예수님은 그곳에 빛으로, 충만으로, 생명으로 오심을 확신하고 주 예수님이 그곳에서 행하실 기적을 기대하며, 확신과 희망을 가지고 목회현장에 임하여야 하는 것이다.
⑶ 약함을 자랑하게 만드시는 예수님
바울 사도는 세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간 놀라운 체험을 간증하면서도 그 자세한 내용을 밝히지 않고 이 체험은 자랑할 것이 못된다고 못을 박는다(고후12:1-5). 바울 사도는 오히려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겠다고 선언한다(고후12:5-9). 그 이유는 약한 데에서 능력이 솟아나기 때문이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기 위해서는 우리의 약함이 필수적인 조건이 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고전 12:9). 그래서 그는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을 기뻐하고 있다.(고전 12:10). 그는 진정으로 약할 그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자기를 강하게 하고 있음을 체험하고 있다. 바울의 하나님은 인간의 나약함 가운데 머무시면서 그 나약함을 은혜와 능력의 샘으로 사용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의 능력의 한계 속에서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의 순간에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며 평안함을 얻는다. 바울은 핍박과 중상모략과 체험과 저주 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더 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거기에서 생겨날 것을 믿고 즐거워한다. 바울은 궁핍과 곤란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공급을 기대하며 소망중에 즐거워한다. 바울의 하나님은 결핍이 있는 바로 그곳에 오셔서 우리를 넘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누가 복음 6장 20-26절까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4가지 복을 몸으로 체험하였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너희 이름은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눅 6:20-23)
가난의 순간에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고, 주리는 순간 주님께서 배부르게 채우실 미래를 소망하며, 눈물로 가득할 때에 웃을 내일을 가지고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예수님 때문에 미움을 당하고, 소외 받고, 중상모략을 하며 버림 받을 때에 하늘의 상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뛰논 것이 바울의 목회의 중심이었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은 빈 그릇을 비었다고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그릇에 하늘의 보배로 가득 채워 안겨 주시는 분이시다. 바울은 이 진리를 깊이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의 약함을 크게 기뻐하고 자랑하고 있다(고후12:9). 자기의 약함을 더 깊이 깨달을수록 그의 그릇은 더욱 깨끗이 비워지며, 더 큰 능욕과 핍박을 받을 수록 그 그릇은 더 커지며, 궁핍과 곤란에 처할수록 더 넘치게 하나님이 채우신다. 빈 그릇을 채우시는 하나님이 바로 거기에 계신데 그 누가 자기의 빈 그릇을 부끄러워하겠는가?
당신은 지금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역을 담당하기 어렵다고 한 숨을 쉬고 있는가? 바로 지금 약한 곳에 임재하시는 주 예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그분을 바라보라. 당신의 빈 그릇을 가득 채우시는 주님을 바라보라. 당신은 지금 능욕과 조롱을 당하고 있는가? 예수님 때문에 소외당하며,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고 있는가? 사람들에게 중상모략을 당하며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가? 그렇다면 기뻐하고 뛰놀아야 할 것이다. 주님은 놀라운 상을 가지고 지금 당신에게 오시고 있다. 당신을 비방하는 그들을 보지 않고 상을 가지고 오시는 주님을 보는 자는 진실로 복되도다. 이제 주님을 위해 고난으로 나아가자.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해 나의 약함을 자랑하자. 우리의 약함 가운데 임재하여 그 약함을 주님의 능력의 샘으로 삼으시는 우리 주님을 찬양하자.
하나님의 교역(Ministry of God) 은 약한 곳에 오시고, 부족한 것을 채우시고, 고난 가운데 영광의 샘을 만드시는 주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목회자는 바로 그 예수님만 의지하여 그 분의 능력으로만 목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 질병의 치유자로 오신 예수님
복음서는 예수님의 교역(Ministry of Jesus)을 소개하면서 한결 같이 질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하신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적들도 대부분이 병든자를 고치시는 사건들이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기적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병을 고친 기적이 예수님이 세우신 사도들에게까지만 나타나고, 성경이 기록된 다음에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병을 고치는 기적은 단순히 증거의 기적일 뿐이라는 주장은 복음서를 읽을 때에 설득력을 잃어 버린다. 어떻게 그 수많은 기적과 사랑의 접촉이 단순히 예수님과 사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사도들임을 증거해 주기 위한 기적에 부과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병든 자들의 병을 고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데에 초점을 맞추었을까? 아니면 질병의 어두움으로 고통 당하는 자에게 그 어두움의 구름을 걷어 버리고 밝은 빛을 선물하고자 하는 사랑과 구원에 초점을 맞추었을까? 필자는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들은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는 증거의 기적이라기 보다는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하여 그들은 구원하시고자 하는 구원의 대드라마의 중심 주제라고 믿는다.
⑴ 예수님의 기본적인 목회주제로서의 치유교역(Healing Ministry).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중심 교역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자와 고통에 걸린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 병자를 대려 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마4:23-24)
마태는 9장 35절에서도 같은 말씀을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태는 예수님의 중심 교역(Ministry)을 심방, 교육, 설교, 병고치심으로 요약하고 있다.
예수님은 옥에 갇힌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보낸 질문에 대답하면서 메시야 사역의 중심 가운데 하나가 병을 고치시는 일임을 천명한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하는 질문은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까?"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진정으로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그리스도입니까?』하는 질문이다. 예수님은 자기의 교역을 소개하므로 세례요한의 질문에 대답한다.
너희의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11:4-5).
예수님은 메시야 시대를 예언한 구약선지자들의 말씀이(예, 사29:18, 35:3-6등) 자기에게 그대로 응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게 함으로 세례요한의 질문에 간접적으로 대답하고 있다. 예수님은 메시야 교역의 중심에 병을 고치며, 약한 자를 강하게 하며, 고난당하는 자들을 축복하는 일들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초기 사역은 병고치는 일에 집중되고 있음을 공관복음서는 아주 분명하게 보 다:
해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 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눅4:40).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리가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막1:32-34).
마태는 예수님의 기본적인 교역의 중심에 병을 고치는 사역이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증명하기 위하여 구약성경을 인용한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8:16-17).
이사야 53장은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의 노래이다. 이 말씀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어떠한 분이신가를 말씀하시며, 메시야 사역의 핵심을 노래한다. 마태는 이사야 53장 4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시기 위한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개념을 넘어서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는 것 뿐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우리의 병을 짊어지시는 것까지 포함한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질병을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병을 치유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역(the ministry of God)을 위임받은 목회자의 기본적이요 중심적인 목회주제 가운데 하는 치유교역이요, 치유교역을 회피하거나 가볍게 보는 것은 하나님의 교역의 근본을 포기해 버리는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목회자들을 통하여 질병의 어두움으로 가득한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의 질병을 치료하심으로 그들을 덮고 있는 사망의 그늘과 어두움의 그림자를 벗겨 내고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으로 가득하게 하려고 하신다.
⑵ 전인치유와 인간구원
예수님의 치유는 병을 고치는 능력이나 병 고침 자체의 기적적 행위보다는 병으로 고통당하는 환자 자신과 그의 전인적인 구원에 더 큰 관심이 있다. 우리가 훌륭한 의사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에 능력있는 의사, 병을 잘 고치는 의사, 진단을 기가 막히게 하는 의사, 뛰어난 기술을 가진 의사등으로 이야기 한다. 의사를 판단하는 기준은 병을 얼마나 잘 진단하고, 그 병을 잘 고치느냐에 있다. 의사가 환자를 사랑하며, 환자의 심정에 공감하며, 병고침을 받은 이후의 삶에까지 관심을 갖는다면 이에서 좋은 일은 없지만 사람들은 의사에게 이런 것까지 필수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의사의 관심이 우선적으로 병을 고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 세계 안에서 병고침의 은사를 받고 병고치는 일에 충성하는 교역자들은 의사처럼 전적으로 병고침에 관심을 집중하지 않는다. 그들은 병을 고치는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은사의 측면을 강조하고, 하나님께서 그 병을 고쳤다는 하나님의 치유를 강조하고, 병고침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는 환자의 신앙을 강조하며, 환자 자신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하려고 힘쓴다는 점에서 의사들과 다른 관심을 가지고 병을 고치며 그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좀 더 포괄적으로 환자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병고치는 교역자들은 첫째로 병자들 자신에게 보다 환자 이외의 어떤 것들을 더 강조한다. 하나님의 은사에 관한 관심, 하나님이 고치셨다는 믿음, 병고침을 받은 자들의 확신, 병고침을 받은 자들로 예수를 믿게 하려는 선교적 관심등을 강조함으로 그들은 환자 자신에게 깊이 관심을 갖지 못한다. 두번째로 병고치는 교역자들은 병을 고치는 그 일, 즉 환자가 건강한 몸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것에 너무 깊이 빠져 있다. 이 모든 것은 교역자들이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관심인 것은 틀림이 없으나 예수님은 이런 것들에 대한 관심을 부차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첫째로 예수님은 환자 자신에게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은 병을 어떻게 고치느냐? 또는 그 환자에게 믿음이 있느냐? 또는 하나님만이 이 병을 고치는 것이니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 등에 그렇게 큰 열정을 보이지 않으셨다. 가끔 환자에게 믿음이 있어야 고치는 것처럼 이야기 한 경우도 있으나(막5:34, 10:52 등), 그 때에도 예수님의 진정한 관심은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환자에게 더 큰 관심을 갖는다. 예수님은 그들을 민망히 여기신다(막1:41).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깊은 연민을 느끼신다(마9:36). 마태는 환자들을 포함하여 고난당하는 인간들을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마4:15-16)이라고 표현한다. 환자들을 어떻게 고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두움과 사망의 그늘에서 고통당하는 그들을 보며, 그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그 현실을 공감하며, 그들을 위해 그 병을 친히 짊어지고 자신이 그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사랑이 예수님을 사로 잡고 있는 것을 본다. 의사는 병을 고쳐주고 얼마나 받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병 고치는 교역자들도 적어도 병을 고친 후에 얼마나 신앙이 부흥하고, 교회가 성장하느냐에 관심을 갖는다. 즉 병고침으로 생겨나는 유익 또는 결과 또는 내가 받는 반대급부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예수님은 환자들을 사랑하고, 환자들을 아끼며, 환자 자신을 위하기 때문에 병고침의 대가로 어떠한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기대는 오직 그 환자들이 더 심한 것이 다시 생겨나지 않게 죄를 범치 않는 것이었다.(요5:14). 그것은 예수님이 받을 반대급부라기 보다는 환자 자신을 위한 권면이요, 부탁일 뿐이다. 오히려 예수님은 환자들의 연약함과 질병을 고쳐 주시고 자신은 그들이 담당했던 연약함을 친히 자기 몸에 담당하시고, 그들이 짊어졌던 병의 짐을 자신의 어깨 위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예수님의 치유는 자기가 짊어지고 담당하는 치유이다. 나는 고통당하고 너는 즐거워하고, 나는 병을 짊어지고 너는 건강하고, 나는 죽고 너는 생명을 얻으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관심이요, 치유교역의 중심이었다. 전적으로 환자를 사랑하여 그들의 심정을 공감하고 그들의 아픔을 예수님 자신이 담당하고, 그들의 건강의 대가로 자신은 그 병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의 치유교역이 바로 오늘 우리가 담당해야 할 치유교역의 모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두번째로 예수님의 치유의 특별한 점은 환자의 전인구원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환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공감, 환자의 몸을 고쳐 건강하게 사는 것, 환자의 정신적인 평안, 환자의 사회관계의 회복, 환자의 영적인 삶의 회복등 예수님은 환자에게 고통을 주는 모든 장애들에서 해방되는 전인적인 건강과 영적인 성장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마가복음 1장 40-45에 나오는 문둥병자의 치유사건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자. 이 문둥병자는 단순히 몸의 질병 때문에만 고통당하는 것이 아니다. ①그는 날마다 지체들 중 하나가 죽어가는 병을 앓고 있는 육체의 질병을 갖고 있는 자다. ② 그는 질병의 공포속에서 불안과 절망과 수치와 원한과 저주를 안고 사는 정신적·정서적 고통을 당하고 있다. ③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 격리 수용되어야 하는 고독의 사람이요, 관계가 단절되어버린 사람이다. ④ 그는 사회적으로 소외를 당하고 문둥병자 촌에 구금되어 벗어날 수 없는 속박을 받고 있다. ⑤ 그는 하나님의 저주의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저주하며 고통가운데 버려두는 하나님이 되어 버렸고 따라서 그는 영적으로 하나님과 단절 상태에 있다. 문둥병자의 문제는 단순히 육체적인 질병만이 아니라 전인적이요, 영적이다. 그의 문제는 단순히 병을 고쳐주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한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아가려고 한다면 전인적인 관심을 주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몸의 질병에서의 회복 뿐 아니라 전인이 회복되어야 하는 자이다.
예수님은 ① 먼저 관계가 단절되어 사람들과 교제가 금지된 이 문둥병자를 만나주셨다. 예수님은 전혀 자격이 없는 그 사람을 만나 주시고 있다. 예수님의 만남은 자격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필요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② 예수님은 그를 민망히 여기셨다. 즉 문둥병 환자와 같은 마음을 품으셨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문둥병자를 보셨다. 문둥병자의 깊은 심정속에 들어가 그의 마음을 고치고 있다. ③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문둥병자의 몸에 대셨다. 육체적인 접촉을 통해서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감싸안고 있다. 예수님은 그를 자기품에 받아 들이고 있다. 문둥병자는 이제 예수님과의 육체적인 접촉 속에서 소외와 단절의 아픔에서 벗어나고 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가고 있다. 과거에 하나님은 자기에게 저주의 병을 주신 분이었으나 이제 자기를 만나주신 메시야는 자기의 더러운 몸에 손을 대시고 받아 주시므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의 문이 열리고 있다. ④ 예수님은 말씀으로 문둥병자의 육체적 질병을 고쳐 주시고 있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그의 병을 고쳐주시는 분이 되셨을 뿐 아니라 그 병을 짊어지신 분이 되셨다. 하나님은 사랑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있다. ⑤ 예수님은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은 자를 제사장에게 보내어 모세가 명한 예물을 바치게 함으로 병에서 나음을 입었다는 공적인 증거를 받게 만든다. 제사장이 공적인 증거는 문둥병에 걸렸던 사람이 사회적인 관계 회복에 필수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 문둥병자의 문제들을 모두 제거하여 한 인간으로서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시고 있다. 얼마나 넘쳤으면, 예수님이 경계했는데도 불구하고 그처럼 많이 예수님을 전파했겠는가?
예수님의 치유는 교역자들의 목회의 모델이다. 치유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누구나 알 고 있다. 치유의 능력이 그분에게서 오고 있다는 것도 교역자들은 알고 있다. 교역자는 하나님의 능력이 흐르는 통로에 불과하다. 교역자들은 이것을 강조하고 여기에 관심을 집중하기보다는 병으로 전인적인 장애를 경험하며 고통하는 환자를 사랑하며 그를 전인적으로 회복시키며, 영적으로 성숙하게 성장시킨 다는 예수님의 관점에 더 집중하여 교역을 하여야 한다.
3.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교역
⑴ 예수님의 오신 목적과 귀신을 쫓아내는 교역자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교역중에서 귀신들린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일반적인 교역들이 많이 있다(마4:24, 8:16, 막1:32-34, 39, 3:11, 6:13, 눅4:41, 6:18, 7:21등). 이 구절들 가운데서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이 병든 자들을 고치신 것처럼, 수많은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마8:16).
마태는 이 말씀 가운데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교역은 아주 일반적인 교역들 중 하나이며 이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할 때에 그 목적은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 주어 귀신과 질병과 약함의 어두움 속에 살던 백성들을 어두움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 예수님의 찬란한 영광의 빛 가운데 살게 하려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그 열두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10:1)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라(막3:14-15).
예수님은 70인을 선택하여 전도하러 보낼 때에도 그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시고 보내었던 것 같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70인이 돌아와서 전도보고를 하는 가운데 그들을 가장 흥분시켰던 경험은 귀신들을 쫓아낸 경험이었던 것 같다: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17-20).
사도 요한은 아주 직접적으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마귀의 일, 곧 사탄의 시험과 귀신들의 역사를 멸하기 위해서라고 선포한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3:8).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가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며 목회자들이 예수님의 교역을 오늘 하나님의 교회와 세상에서 행하여야 한다면 목회자들의 교역 가운데 중요한 항목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공관복음에는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일반적인 교역외에 귀신들린자를 구원하신 7가지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① 회당에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자를 구원하심(막1:21-28, 눅4:31-37).
② 귀신들려 시각 장애와 청각 장애를 당하는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심(마12:22-29, 막3:22-27, 눅11:14-23). ③군대 귀신들린 거라사인을 구원하심(마8:28-34, 막5:1-20, 눅8:26-39), ④ 흉악한 귀신들린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구원하심(마15:21-28, 막7:24-30), ⑤ 귀신들려 간질하는 소년을 구원하심(마17:14-21, 막9:14-29, 눅9:37-43), ⑥ 귀신들려 불구가 된 여인을 해방시킴(눅13:10-17), ⑦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고 그 사람을 구원하심(마9:32).
⑵ 예수님의 축사교역의 암시점들
우리는 이 사건들을 자세히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본 장의 목적이 아니다. 본 장은 예수님의 교역의 초점이 어디에 있었으며,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목적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를 보임으로 우리의 교역의 주제와 모델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귀신을 쫓아내신 교역의 근본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아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은 그의 저서 『나는 사탄의 멸망을 믿는다』에서 예수님의 축사교역의 강조점을 12가지로 요약하고 있는데 그것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Michael Green, 오성춘역, 1994, pp.178-181).
①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를 찾아가지 않으셨다. 거의 모든 귀신 쫓아낸 기록들을 보면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구원을 받았다.
② 예수님은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셨다(마8;16). 예수님은 귀신들을 꾸짖으셨다(마9:25). 그리고 일반적으로 예수님은 논쟁하지 않으셨다. 참으로 예수님은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막1:34). 오직 유일한 예외는 군대 귀신들린 거라사인의 사건뿐이다.
③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으로 행하셨다(마12:28). 누가복음에는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이 일을 하셨다고 했는데(눅11:20) 이것은 구약성경의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성령의 권능과는 동의어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믿음과 기도와 금식으로 귀신을 쫓아내셨다(막9:29, 마17:20).
④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나가라는 명령을 반복해야 했다. 귀신들은 언제나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즉시 순종하지 않았다. 우리는 마가복음 5장 8절에서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기록된 말씀을 읽는다. 이 말씀은 진행을 의미하는 시제를 쓰고 있다. 그 뜻은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는 과정에 있었다』또는 『예수님은 계속하여 귀신을 쫓아내고 있었다』로 읽을 수 있다.
⑤ 어떤 경우에 예수님은 귀신에게 나오라고 명하기 전에 귀신에게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눅4:35). 아마도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비유로 하신 말씀대로 그의 집에 들어가지 전에 강한 자를 결박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⑥ 예수님은 가끔 악령에게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명하고 있다(막9:25). 다시 한번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서 더러운 영이 다른 귀신들을 데리고 본래의 사람에게 돌아온다는 비유와(눅11:24-26) 연관하여 이 말씀의 뜻을 생각할 수 있다.
⑦ 예수님은 언제나 귀신에게 직접적으로 명령하고 있지 귀신들린 사람에게 명하지 않는다.
⑧ 예수님은 귀신에게 억압받는 자와 귀신들린 자를 구별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오늘날 인위적인 구별이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헬라어 daimonizomai는 귀신들렸다는 말이고, 가끔 나오는 echein damonion은 귀신을 가졌다는 말이다. 귀신억압과 귀신들림을 구별하는 현대의 관행은 헬라어 성경에 아무런 기초가 없는 것이다.
⑨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었고, 반면에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셨다. 이 구별은 중요하다. 가끔 누가복음 9장 1,2절과 13장 32절과 같이 그 구별은 유지하면서도 양자의 연계를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현대의 귀신 쫓는 교역에서 보면,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만은 부족한 경우가 많다. 동시에 그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이 꼭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귀신을 쫓아내는 일과 병고치는 일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⑩ 한번은 예수께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귀신을 쫓아내었다고 기록되었다(마15:28). 그 상황을 보면, 큰 믿음과 끈질긴 노력과 외골수의 간구가 이 기적을 일으키고 있다고 암시하고 있다.
⑪ 예수님의 권위가 이런 귀신 쫓는 교역에서 아주 중요하게 드러나고 있다. 귀신들은 아무런 질문 없이 그분께 순종해야만 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파송을 받은 제자들마저도 귀신들이 자기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발견하였다(눅10:17,20)
⑫ 십자가는 사탄과 그 추종자들인 귀신들의 패주의 절정이었다. 이것은 복음서 여러곳에 언급되었으나 마태복음 8장 16-17절은 이것에 관하여 중요한 힌트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사야 53장에서 인용한 이 구절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고 하신 17절 말씀은 16절에서 행하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에 적용되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구약의 예언을 인용한 것이요, 구약에서 끌어내어 예수님의 교역에 적용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완전히 우리의 질병과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원수를 패배시킨 곳은 바로 십자가 상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삶으로 돌아가 그것을 적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치유와 귀신쫓아 내는 모든 교역에서 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은 갈보리에서 보여준 본 영화의 예고편과 주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교역 과정에서 예수님께 상처를 입은 사탄과 그의 추종자 귀신들의 반발이 예수님을 십자가 위의 고난으로 이끌었으나 결국 그 장소가 그들에게 결정적인 패배의 장소가 되었다. 즉 십자가는 예수님과 사탄과의 갈등의 전 과정을 종결짓는 결정적인 사탄의 패배의 장이 되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귀신들을 쫓아내는 교역에서 견고히 설 수 있는 근거지가 된다.
우리는 귀신들린 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교역에 관해서 장을 달리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 할 것이다. 본장은 귀신을 쫓아내며 사탄의 시험에 대항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들어오게 하는 중대한 예수님의 교역이요 십자가는 이 교역의 정점임을 암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⑶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
성경은 귀신들을 사탄의 추종자들로서 사탄의 대리인으로 활동하며, 사탄의 왕국을 지속시키려고 하나님께 반항하는 자들이라고 가르친다. 귀신의 작전과 능력과 목적등을 알기 위하여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실 귀신들림과 사탄의 유혹을 받는다는 말은 구별된다. 후자는 사탄이 사람들속에 들어오지는 않으나 끊임없이 성도들을 자기의 지배 아래 끌어들이려는 사탄의 수단이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좀 더 자세히 보자.
요한계시록 12장은 사탄과 그 추종자들의 활동과 계획과 원대한 포부에 관해서 희미하게나마 우리가 깨달을 수 있게 계시한다. 그 가운데 사탄의 존재의 근원과 귀신들의 시작을 이야기해 주는 구절들을 보기로 하자.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는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는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요한계시록 12:7-9).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관하여는 사람들마다 약간씩의 차이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구절들 가운데서 시탄과 그 추종자들의 기원과 계획과 방법에 대해서 약간의 결론을 얻을 수 있다.
① 사탄은 본래 하늘의 존재로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 가운데 하나이었다. 에스겔 28:14은 사탄이 본래 어떠한 존재이었는가를 암시하는데 그가 "화광석 사이에서 왕래하였었도다"하고 기록한다. 여기에 언급한 화광석은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말로 사탄은 본래 하나님의 높은 보좌 사이에서 왕래할 특권을 가진 천사였다,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서 왕래하였었도다"(겔28:14). 덮는 그룹이라는 말은 아주 높은 천사를 지칭한다. 사탄은 본래 높은 지위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였다.
② 하나님의 천사로 하나님의 보좌사이를 왕래하던 사탄은 어떠한 이유로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천사장 미가엘은 사탄과 더불어 싸우게 되었다. 이 때 하늘 나라의 천사들은 양진영으로 나누어져 미가엘을 따르는 천사들과 사탄을 따르는 천사들이 하늘 전쟁에 참여하여 서로 싸웠다.
③ 이 싸움에서 사탄과 그의 사자들은 패배를 당하여 하늘에서 더 이상 있을 곳을 찾지 못하여 세상으로 쫓겨났다. 사탄은 이제 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어 세상을 자기 손에 장악하게 되었다.
④ 사탄의 사자들도 사탄과 함께 하늘에서 쫓겨나 세상으로 들어 왔으며, 그들은 사탄의 추종자로서 사탄의 계획을 수행하는 대리인이 되어 사탄의 세상 통치를 돕는 자들이 되었다. 바로 이들이 귀신들이라고 불리는 자들이다.
⑤ 사탄과 귀신들은 본래 하나님의 천사들로서 영적인 존재이며, 놀라운 힘과 권능을 가진 자들로 오직 하나님의 천사장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에게 쫓겨난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이길 힘은 우리 인간에게는 없으며 오직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을 십자가로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다. 그 분은 마귀의세력을 멸하러 오신 분이시다. 우리는 그 분을 의지하여서 사탄과 귀신들을 이길 수 있다.
⑥ 사탄은 대표적인 이름이요 그에게 붙은 별명들이 많이 있다. "큰용", "마귀", "옛뱀", "온 천하를 꾀는 자"등으로 우리는 수많은 그의 별명 가운데서 그의 세상에서의 사역과 그의 특성을 읽을 수 있다.
⑦ 사탄은 "세상을 꾀는 자"이다. 요한계시록 20장 10절은 "저희를 미혹하는 자" 즉, 성도들을 시험하여 미혹에 빠지게 만드는 자라고 했다. 요한계시록 13장 14절은 여러가지 표적과 기사를 이용하여 세상 사람들을 미혹하여 자기의 지배하에 두려는 자라고 하며, 예수님은 사탄을 "거짓말 하는 자요 거짓의 아비"(요8:44)라고 선언한다. 사탄은 위장의 대가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에 언제나 성도들과 사람들을 미혹하여 자기의 지배를 받게 만들고자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 자이다.
사탄은 왜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었을까? 첫째로 에스겔 28:11-19까지 말씀은 사탄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배반하였다고 가르친다. 그는 지음을 받을 때부터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다"(28:12). 사탄은 하나님의 동산에서 각종 보석으로 단장하였고 그를 위해 소고와 비파가 준비 되어었다(13절). 그는 기름 부음을 받는 덮는 그룹으로 하나님의 보좌사이를 왕래하는 특권을 받은 자였다(14절). 사탄은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것들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완전하고, 놀라운 특권과 아름다움을 가진 존재였다. 그러나 그가 "아름다움으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영화로움으로" 자기의 "지혜를 더럽혔으며"(17절) 하나님의 산에서 쫓겨났다.(16절) 사탄은 모든 것에 넘치는 복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그를 넘어지게 만들었다.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는 말씀이 아닐까?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6:24-26).
두번째로 사탄이 하나님을 배반한 이유는 하나님의 자리를 노리는 욕망 때문이었다고 이사야 14:12-20절까지에서 암시한다. 사탄은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자와 비기리로다"(사14:13-14)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하늘에서 쫓겨나 세상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 가운데서 사탄은 "내가"라는 말을 5회나 반복하면서(우리말 번역에는 두번만 사용) 자기 중심적인 그의 특성을 아주 적나나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사탄은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자기 중심적인 삶을 지향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을 자랑하게 하고 자기유익을 구하여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게 만든다. 사탄이 태초에 "옛뱀"으로 화하여 하와를 유혹할 때에도 그의 본성인 거짓말(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하는 거짓말을 함, 창3:4, 창2:17 비교)을 사용하여 하와를 유혹하고 그녀의 이기적이요 자기 중심적인 본성을 자극하여 범죄하게 만든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우리는 여기에서 사탄의 시험의 특성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사탄은 우리 인간들에게 자기의 아름다움과 지혜와 특권들을 구하게 하여 거기에 빠져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영광을 구하게 만들므로 사탄에게 종속되어 살기를 원한다.
② 사탄은 자기 중심적인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여 언제든지 자기의 유익과 자기의 명예를 구하게 만들므로 하나님을 나에게서 떠나게 만들고 모든 일을 자기 중심에서 하게 만든다.
③ 사탄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고 자기를 보게 만든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보면서 열등감과 수치심에 빠지게 만들어 끊임없이 사탄의 방법을 배우고 사탄에게 자기의 양심을 팔게 만든다.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시험에 빠져 하나님을 배반했을 때에 처음 느낀 감정은 부끄러움이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며 자기를 비하시는 일이었다(창3:6-13).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완전히 비운 분이시다(빌2:5-6).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사탄의 방법을 완전히 부정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분은 철저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고난당하는 사람들만 위하심으로 사탄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신 분이다. 그리고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시며, 고난당하는 자들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게 도우시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안에서 예수님을 따를 때에 사탄은 우리에게서 물러가고 성령 안에서 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② 이웃을 위해 헌신하며, ③ 자신을 존중하며 이웃을 존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장애자들을 완전케 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참 빛으로 이 세상의 어두움 속에 들어오셔서 어두움의 세상을 빛의 영광으로가득하게 만드시고자 했다면 불구자들과 장애자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완전하게 만드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장애자들만큼 어두움의 그늘에 살고 있는 자들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⑴ 장애자들의 상황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이스라엘의 장애자들은 마태가 이야기하는 그대로 흑암에 앉은 백성이었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이었다. 인간이면서도 인간으로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인간답게 살지도 못하고 천대와 멸시와 고난 가운데 살아야 했다. 성경의 불구자들은 대부분이 거지생활을 했다. 그들은 평생동안 구걸하여야 하는 운명의 사람들이었다. 어제도 거지, 오늘도 거지, 내일도 거지, 죽을 때까지 거지 생활해야 하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라. 예수님 당시에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더욱 비참하였다. 맹인으로 태어난 자는 7세까지 부모에게 도움을 받으나 그 이후부터는 거리에 나가서 구걸해야 하며, 그 당시 사람들이 맹인의 눈을 보기 싫어하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갈 때에는 보자기를 뒤집어 써야 하는 것이 맹인들의 삶이었다(노만 샤우척,『영성훈련 지침서』pp.62-63). 바디메오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 겉옷을 벗어버리고 예수님께 달려간 것은(막10:50) 겉옷 어깨에 연결되어 있는 눈을 가리는 보자기를 벗어 버리고 수치스러운 맹인의 눈을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갔다는 뜻이다. 다른 인간에게는 수치스러운 눈이기 때문에 보자기로 가리워야 하지만 다윗의 자손 예수(구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는 더러운 수치를 영광의 빛으로 고치시고 어두운 눈을 뜨게 하시고 장애자를 완전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