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사역 할것인가? 4). 설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본문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침례를 주라 하심이 아니요 복음을 선포하라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효로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는 십자가를 선포함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됨이라(고린도전서 1:17,18)
감히 설교에 대하여 논한다는 사실이 쑥스럽습니다. 그것은 사실 나 자신조차도 설교에 대하여는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매끄럽고 부드러운 말과 회중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논리와 웅변을 겸비할 수만 있다면 보다 자신 있게 설교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렇지 못한 제가 설교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고 결심한데는 설교가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비록 말에는 서투를지 모르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오직 우리는 너희 가운데서 모든 일로 온전히 드러났느니라"(고후 11:6)
"그들이 말하되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함께할 때는 약하고 그의 말도 형편없다 하는도다"(고후 10:10)
우리는 설교가 말을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말씀들을 보면 결코 설교가 말을 잘하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바울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모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는 대변인 격인 아론을 내세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대언하는 그로서도 보다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전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주께 아뢰되 오 내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하지 못한 자니이다 지금까지도 그러하였고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이후에도 그러하오니 나는 말이 느리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하니"(출 4:10)
저는 설교를 평가함에 있어서 그의 논리나 매끄러운 표현들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들은 때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속여 장사를 하거나 사기를 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말과 행동이 매우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참말로 만드는 재주를 가진 자들입니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실제로 교회 안에도 거짓 진리들을 참인 것처럼 가르치는 자들이 이 시대에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람의 말을 듣고 설교를 평가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것이 없다는 사실들을 먼저 깨달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 우쭐대는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권능을 알아 보겠노니 이는 하나님의 왕국이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권능에 있기 때문이라(고린도전서4:19,20)
설교를 평가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말을 잘하는가가 아니라 그의 말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열매들을 맺어가고 있는 가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설교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설교와 성경공부는 다릅니다.
우리가 그분을 선포(preach)하여 각 사람에게 경고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teaching)은 가가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완전한 자로 드리고자 함이니(골로새서1:28)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설교와 성경공부의 차이를 알지 못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교회가 굳이 이 두 가지를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매주일이 되면 어김없이 동일한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설교자는 그들을 향해 좀 더 유익한 말씀들을 전하기 위해서 많은 연구를 하고 준비를 한 내용을 들고 말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설교를 하는 강단이 단순히 성경을 가르치는 자리일까요? 저는 이 대답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강단은 너무도 많은 지식들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이 이해를 하든지 못하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직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면 여지없이 그 주일에는 성도들에게 그것들을 가르쳐야만 합니다.
설교는 선포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 말을 좀 더 쉽게 설명한다면 설교에는 경고의 의미를 담아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설교들은 대부분 듣는 자들에 대하여 설득하거나 이해를 시키려는 의도로 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책망과 징계에 관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설교다운 설교를 듣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것들은 대부분 지옥에 대하여 말해야 하고, 심판에 관하여 설명을 해야 하며, 하나님의 징계를 말해야 하기 때문에 전하는 자의 입장에서도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현대인들이 자기들의 귀에 거슬리는 말들을 너무도 싫어하기 때문에 설교자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까닭에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선포를 중단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으로 자신들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말씀은 복음 선포(Preaching)를 통하여 정하신 때에 드러내셨으니 이 복음 선포가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내게 맡겨졌느니라(디도서1:3)
우리는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선포를 통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을 대신했던 바울도 역시 많은 이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도 성경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분들이 선포의 일들을 중단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힘썼다면 이러한 어려움들은 겪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선포에 비하여 가르치는 일들은 온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공부는 말 그대로 공부를 통해 지식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할 때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이해시킬 수도 있으며, 꾸준히 가르침으로서 생명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듣는 이들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생명이냐? 영벌이냐? 천국이냐? 지옥이냐? 영접이냐? 불신이냐? 하는 결단들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매주 이러한 설교들을 계속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매주 복음을 들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다짐을 해야만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임이 있을 때마다 빵을 나누었습니다(행2:46). 그들이 그렇게 한 까닭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설교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만일 설교자가 복음의 대한 내용을 말하지 않은 채 설교를 마쳤다면 그것은 설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설교의 주제가 무엇이 되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 안에는 반드시 복음을 말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성도들에게 경고해야만 합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죄로 인하여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매주 강단에서 설교를 해야하는 이유는 단 한 사람도 지옥에 가도록 방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돌아보십시오. 아직도 교회 안에는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설교자는 당연히 그들을 향해 말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얻어 구원받으십시오"
2. 설교는 상담이 아닙니다.
어떤 목회자는 말합니다. "나는 강단에서 심방과 상담을 모두 한다" 이 말은 매우 매력적으로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상담은 상담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상담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위로자가 되시는 성령님이 아니십니까?(요14:16) 만일 설교를 통하여 상담을 하려 한다면 이는 성령님의 활동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은 이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설교자가 성도들을 향해 언제나 결단을 요구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설교를 통해 자신들이 위로를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위로가 어떤 위로를 받기를 소원하느냐에 따라서 설교의 역할은 매우 달라집니다. 만일 성도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각가지 일들에 대하여 위로를 받기 원한다면 그는 차라리 설교를 듣기보다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말씀대로 살다가 확신을 잃어 가는 성도가 있다면 복음에 관한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매우 큰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에게 주어진 설교가 결코 상담을 위해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는 설교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인하여 시험에 드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설교자들이 은혜가 충만하여 전할 때마다 마치 자신을 향해 설교한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설교자가 같은 말을 한다 하더라도 듣는 이들은 각기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고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은 그 자체가 능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자가 그들의 마음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이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권능이 있어 양날 가진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나누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니(히브리서4:12)
설교를 듣는 이들은 당연히 자신을 향한 경고를 듣는다는 자세로 임해야만 합니다. 만일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자가 사소한 감정을 가지고 설교를 하거나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시험에 들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설교는 설교 그 자체로 말하고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관계가 무너지게 된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교회들을 향하여 말씀하실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설교는 결코 상담일 수 없습니다."
3. 설교는 회중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교회에서 금기시 되는 몇 가지의 설교가 있습니다. 가령 물질에 관한 설교라든지, 단정한 옷차림, 경건한 생활을 위해 필요한 행동들, 즉 술과 담배 도박, 영화관 출입 등과 같은 것들은 교회를 고리타분하고 숨막히게 만든다는 이유로 설교하기를 꺼려 합니다. 그러나 만일 설교가 성도들의 죄 문제를 지적해 줄 수 없다면 무엇으로 그들에게 경고할 수 있습니까? 만일 설교가 성도들의 생활과 관련이 없는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것은 결코 설교일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복음적인 교회들에 대하여 매우 진보적인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가령 헌금을 하지 않아도 되고, 개인의 생활에 대하여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약간의 방탕한 생활이 허용되고 또한 그것들을 적당히 눈감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죄에 대하여 지적을 하는 것은 종교적이고 율법적인 교회에서나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 설교는 결코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 대상을 바라보고 계셨고, 그들의 죄들을 지적하셨습니다. 심지어 그들에게 매우 심한 말로 책망을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가령 "독사의 자식들아" 이 말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즐겨 사용하시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설교를 시작할 때에 사도들의 모습을 볼까요. 베드로는 성령이 임한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사람들과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아 이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행2:14) 그는 성령이 충만하여 혼자 중얼거린 것이 아니라 분명한 대상을 놓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는 바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바울이 마르스의 언덕 한가운데 서서 이르되 아테네 사람들아 내가 알고보니 너희가 모든 일에서 지나치게 미신에 사로잡혀 있도다"(행17:22) 그는 아테네 사람들의 미신을 숭배하는 것에 대하여 허공을 향해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 대상들을 향해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설교에 대하여 말하면서 이러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설교는 당연히 회중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설교자들은 설교가 회중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기 때문에 듣는 자들과는 관계없이 말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미 앞에서 설명을 했지만 회중과 관계없는 설교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지식을 전달하고, 아름다운 말로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준다 할지라도 회중과 관계 있는 설교라야 만이 참 설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가 회중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면 그 설교는 의미가 없습니다. 설교는 결코 자리에 없는 회중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4. 설교가 결코 신비적으로 보이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유명한 설교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높은 톤으로 혹은 지나치게 낮은 톤으로 설교하는 모습들을 봅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매우 신비적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 때는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좀 더 근엄하고 은혜스럽게 들리게 하기 위해서 산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약간 쉰 목소리로 설교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요즘에야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아직도 그것을 은혜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상대방에게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히려 설교자의 목소리가 쉰 상태이거나 지나치게 높은 톤으로 사람들의 귀에 거슬린다면 말씀의 전달에 많은 문제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자칫 복음의 전달 효과를 줄임으로서 설교자가 그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문제를 드러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굳이 설교를 함에 있어서 웅변조로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평상시 자신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근엄한 목소리를 낼 필요도 없습니다. 일상적인 대화의 수준으로 말하십시오. 우리는 위대한 설교가라고 생각되는 바울이 그리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비록 말에는 서투를지 모르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오직 우리는 너희 가운데서 모든 일로 온전히 드러났느니라"(고후 11:6)
"그들이 말하되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함께 할 때는 약하고 그의 말도 형편없다 하는도다"(고후 10:10)
우리는 성경에 기록한 사실을 봐서도 바울이 말을 유창하게 하거나 근엄한 모습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설교는 결코 신비적인 말투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연약하면 연악한 대로, 강하면 강한 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를 통하여 전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누구도 설교를 훈련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설교자는 하나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 도구를 쓰셔서 전달하시는 이는 바로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아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설교는 결코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매우 탁월한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매우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지식을 설교에 반영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을 구원으로 이끌었던 유명한 설교가들의 설교를 가만히 들어 보십시오. 그것을 듣는 순간 우리의 기대는 완전히 무너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지식을 드러내려는 설교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가 있지만 설교는 불신자들이나 경건치 못한 자들을 바르게 인도할 수 있도록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설교자는 많은 지식을 드러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간단하고 쉬운 말로서 그들을 인도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설교자들이 지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만일 전하는 자가 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하면 자칫 엉뚱한 설교를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드러내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바르지 못한 지식으로 가르치는 말이 아닙니다. 설교자들은 전하는데 있어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청중들에게 전하는데 있어서 그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사용함으로서 듣기에 거북하게 해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듣는 이들은 다양합니다. 어린이로부터 노인까지, 무식한 자로부터 지식이 있는 자까지 교회는 고르게 사람이 분포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설교자가 어려운 말을 씀으로서 듣는 자가 알아듣지 못하고 결국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그것보다 큰 손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보다 쉬운 설교를 하십시오 그러면 분명히 더욱 많은 이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6. 설교가 반드시 성경 본문만을 이용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의 기본 뼈대는 반드시 성경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설교를 진행해 감에 있어서 반드시 성경에 있는 것만을 예로 들어가면서 설교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제로 불신자들이나 경건치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성경보다는 세상의 일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있는 이야기만을 고집한다면 그들은 아예 귀를 막아버릴지도 모릅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성경 말씀이 살아있고 권능이 있는 것(히4:12)이기 때문에 성경만을 말한다면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저도 이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들의 마음이 열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설교를 진행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도 많은 비유를 들어가면서 설교를 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바로 설교의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시대가 많이 변해 있어서 우리가 이제는 논과 밭을 예화로 들기에는 너무도 삭막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설교의 재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에서는 과거보다 더욱 많은 사건과 이야기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화들은 보다 효과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는다면 반드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예화가 성도들과의 생활과는 무관한 내용으로 진행되어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할수만 있다면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설교의 재료로 삼으십시오. 보다 현장감이 있는 설교의 재료들은 성도들의 마음을 쉽게 열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설교 중에 예화를 돕기 위해 많은 책들이 출판되어 나와 있다는 사실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그러한 책들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비유나 예화들이 설교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만일 우리의 삶 가운데 비유를 들만한 사건들이 없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설교를 함에 있어서 보다 폭넓게 다양한 내용들을 담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설교의 집중력을 흔들어 놓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강단에 서면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대부분 교회 밖을 나가면 방금 들었던 설교들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너무 많은 예화들은 자칫 설교의 주제를 혼돈스럽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예화를 드는 것을 삼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설교는 단순하면서도 그 날 설교의 주제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적절한 예화를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번 이러한 식으로 설교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 번 기도해 봅시다. 그렇다면 반드시 많은 이들을 구원으로 이끌만한 설교를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7. 가장 효과적인 설교는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설교에 방법은 없습니다. 복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듣는 이들이 구원에 이를 수만 있다면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여도 무방합니다. 우리는 이일을 위하여 연극적인 요소, 예화, 비유, 시청각 등 자료를 사용할 수도 있으며, 보다 열정적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방법을 쓰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또한 그들이 들은 말씀들을 오래도록 기억하도록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열린 예배를 지향하여 예배에 연극적인 요소들과 뮤지컬 공연으로 예배를 드리는 모습에 대하여 듣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방법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설교의 가장 기본 원칙인 선포가 없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기억에 남는 예배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올바른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설교에 이러한 연극적인 요소들과 뮤지컬을 비롯한 각종 시청각을 동원할 수만 있다면 권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설교가 성도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될수록 좋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선포자가 어느 정도 디자인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단순히 원고만을 준비하고 강단에 올라가서 주어진 원고의 내용을 읽어 가는 정도의 설교라면 듣는 이들은 매우 지루해 할 수도 있습니다. 설교자는 성도들로 하여금 설교를 기대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물론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상적인 설교라도 큰 은혜가 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설교가 믿음이 좋은 성도들만 앉아서 듣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들을 위해서 준비되고 계획된 설교가 준비되어야 한다는 거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는 시간들을 가리켜서 Worship service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복음을 선포함에 있어서 설교자에게 기준을 두는 것이 아니라 듣는 회중에게 맞추어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결론
설교는 이론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날에 주어진 말씀에 따라 그 능력이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지식과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성경이 가르치는 바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는가에 따라서 설교자의 능력이 평가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은 것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많은 기도의 시간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해 줄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들의 설교를 통하여 더욱 많은 이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바랍니다.